화낸 자의 결과는 부끄러움과 폭망이다 1.
첫 시간 같은 두 번째 필라테스(첫 시간은 일정 착각으로 절반밖에 하지 못했다) 강습을 마친 날이었다. '노동 전 운동'을 신봉하는 믿음은 시작부터 내려놓고 현실과 타협할까 싶었다. 일하기 전에 기운을 얻기 위해 시작했는데, 필라테스를 마치면 당장 걸을 힘도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지옥의 필라테스를 맛보겠군."
수업을 앞둔 나에게 E는 미리 예고했었다. 예고대로였다. E가 매번 운동 후엔 잠시라도 수면을 취하고, 더불어 평소보다 더 많이 배고파했던 일상이 비로소 내 일처럼 다가왔다. 게다가 E는 필라테스 회원님으로 치자면 나보다 몇 년은 선배지만 아직까지 운동 후 기운 찬 모습을 보여준 바가 한 번도 없었다.
‘덜덜덜덜.’
운동장을 나서는 내 다리는 심히 후달거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개의 다리는 마치 '또 이렇게 쓰면 아무리 네 것이라고 한들 결국은 네 것이 아님을 알려주겠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이 내 의도와는 자꾸만 벗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기운을 얻기는커녕 있던 기운마저 다 써 버려서 바닥을 칠 것 같은데, 퍼뜩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햄. 버. 거'
운동 직후의 점심시간, 별로 힘들이지 않았던 첫 강습 후엔 근손실까지 막아주는 최적의 음식, 닭가슴살을 먹을지 말지 꽤나 고민하는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햄버거라는 뇌의 결정은 고민이 필요 없는 단 하나의 메뉴였고, 내 손가락은 이미 운동장 건물 계단 3층을 다 내려오기도 전부터 거리 순으로 가까운 햄버거 집 중 가성비 1등 장소를 향하여 액정 위에서 '위아래'로 운동하고 있었다. 다리와 뇌와 배와 옆구리가 나를 제쳐 놓고 알아서 서로에게 최고인 액션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주고받기라도 하는 건지. 두 다리는 곧 350미터 이내에 있는 노브랜드 버거로 후덜거리면서도 뚜렷하게 직행했다.
햄버거는 대학생 땐 주 2-3회는 거뜬히 즐겼지만, 언젠가부터 별로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당장 필요한 호랑이 기운을 급격히 뻗치게 해 주리라는 기대가 갑자기 햄버거에게 샘솟은 이유는 뭘까. 시그니처 세트를 반 정도 해치운 후에야 그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와서, 천천히 햄버거와 함께 떠오른 정보를 복기했다. 한두 달 전에 유튜브로 본 히딩크 다큐멘터리 영향이 가장 컸다. 하지만 히딩크가 경기 전에 국가대표 축구팀 식단으로 주문한 음식은 스파게티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제 나는 두 다리와 이어지는 몸뚱이는 물론이고, 뇌가 재빨리 그 회로 안에서 판단하여 내리는 결정도 완전히 믿기 어려워졌다. 뇌도 다리와 마찬가지로 덜덜덜덜 제멋대로 운동하며 얻은 정보를 조합했을 것이다. 그 결과, 스파게티에 한정된 사실이 어느 틈에 스파게티에 햄버거를 추가된 사실로 발전되었다. 나에게 속한 어느 부분도 내 것인 듯 완전히 내 것은 아닌가보다.
어쨌거나 햄버거는 꽤 괜찮았다. 처음 먹어보는 노브랜드의 시그니처 버거 세트는 다음에도 또 먹을만한 맛이었고, 무엇보다 작업실까지 갈 용기를 두 다리와 팔과 옆구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운동 후 햄버거 식사에 대해 동의하는 이가 (각자의 이유는 모르지만) E 외에도 더 있었다. 나는 '경기 전엔 스파게티'라는 히딩크의 선수 식단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 후엔 햄버거를 먹어야 호랑이 기운을 낼 것이다'라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고, 운동 후의 식사로 햄버거를 먹는 무리 중 하나였다.
"아이폰12 보상기변 무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쳐갈 때쯤, 투명한 창 너머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흰 광고판 중앙에 빅 사이즈로 뚜렷이 적힌 볼드체의 검은 문구였다. "홍대 유일 친절 매장"에서 준비한 광고판이었다. 그 맨 아래쪽에는 비교적 거의 안 봐주길 바라는 것처럼 작은 크기로 적힌 문구도 첨부되어 있었다.
"카드 30만 원 이상"
보나 마나 특정 카드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결국엔 일부 지원금에 한하여 할인을 해주는 상품일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한 번 알아나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요즘 내 아이폰 액정은 종종 자판이 잘 안 먹히는 일이 발생하던 터였다. 조건만 맞으면 비용 없이(?) 새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고민 같은 걸 하다가 식사를 마쳤다.
햄버거 가게에서 나왔다. "홍대 유일 친절 매장"은 바로 그 아래층에 자리한 ◯◯통신사 대리점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호등을 건너면 작업실로 향하는 방향인데, 아직 빨간 불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아까 하던 고민 같은 걸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호등이 곧 초록불로 바뀌었고, 대리점 앞에 멈춰 있던 발은 반사적으로 움직여서 신호등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동거인이 사용하던 아이폰X 공기계를 물려받아 사용하던 중이었지만, 그가 2년을 쓰고 내가 6개월 정도를 더 썼으니 아직 기계를 바꿀 정도로 불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몸은 힘들고 햄버거는 맛있었던 와중에 눈에 들어온 말끔한 광고판 하나에 내가 너무 급작스럽게 고민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호등으로 걸은 지 대략 5m 정도도 못 가서 발길을 이전 방향으로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