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를 만나면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아주 친밀한 사이는 아닌 J의 삶이 자꾸 궁금한 건 당연하다. 가까운 관계였다면 오히려 궁금한 이야기가 그닥 없었을 테니까. J 일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때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 정도로 그를 많이 안다고 착각했을 거다. 나와 거리에 있는 사람과 점점 궁금해질 것 없는 관계가 되어 가는 일이 흔하다.
아무책방 종업을 매개로 J와 연락을 받고 준 날, 그래서 내 업무 상태가 시작 때와 달리 너무 느슨한 상태임을 그대로 반영하는 계좌 기록을 확인한 때는 정규 직장 생활을 그만둔 지 9개월차를 지나는 시점이었다. 대학 졸업 직전에 일자리를 구하고 한 번 이직한 곳에서 쭉 일하다가 저널 <삼>을 만들고,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퇴사를 하면서 일과 자리에 대한 변화를 통과하고 있었다. 애인과 동거를 병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바뀐 생활,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이 곧 일터가 된 상황에서 겪는 예상치 못한 혼란들은 '일'을 주제로 한 <삼> 3호 기획의 장기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줄곧 '일'에 관한 불안과 같이 가고 있으니까. 이런 불안이었다. 바뀐 일의 자리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을 이 사회는 허용해주지 않을 거 같은데, 시간은 계속 가고 있다는 거.
조직 안에 있을 때는 시스템과 업무 관계 안에서 맞물려 가면서 속도감 있게 일할 수 있었다. 이는 분명 장점이었다. 물론 그 밖으로 나온 이유도 명확했지만.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걸로 공공연히 측정되는 커리어로 사회적 존재감이 증명되던 시간들과 달리 회사 밖에서 일 만드는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그 모든 걸 자가동력만으로 갖추고 획득하고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다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조직 안에서나 밖에서나 시스템은 필요하니까. 그런데 여건상 일터로 잡은 집에서는 자가동력이 필요한 일들과, 일터를 유지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노동들이 널려 있었다. 후자 중에 전자를 위한 일의 경계를 따로 구분하기는 어려운데다가, 출근하는 동거인보다 스스로 후자에 투자하는 시간을 마땅히 도맡았다. 다양한 노동 간 최적의 균형을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를테면 해 먹고 치우는 건 점심 시간만을 위한 사이즈보다 커졌고, 내가 출근하는 책상은 곧 식탁이어서 일의 맥락이 자꾸 치워졌다. 그 사이 컨트롤할 수 있던 경제력이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고, 내가 무슨 일(들)을 하는 사람인지 나조차 헷갈렸다.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우울한 시간이 자꾸 돌아왔다.
J에게 묻고 싶은 것들은 어쩌면, 새로운 일의 자리에서 마주하는 불안의 시간 속에서 내가 일에 관해 다시 발견하고 싶은 물음일 수도 있다. 오래된 일의 구조들과 짝지어지지 않아서, 정지된 것처럼 오독될 수 있는 슬픈 일의 쓸모와 의미들을 각자의 자가동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은 게 <삼>이 세 번째로 만들려는 일이었으니까. J가 커리어를 중단하고 새로 시작하고, 일을 옮겨가는 중에 중요히 여긴 것들은 그만의 일의 맥락과 기쁨과 슬픔 속에 있다가도 내 일과 만났던 것처럼. 각자의 일의 고유하고 기쁜 맥락들을 계속 기억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연결될 수 있는 관계가 계속 만들어지도록. J의 일 이야기로 를 <삼> 3호 열고 싶다고 하니 답이 왔다.
"<삼>의 3호라니 ㅎㅎㅎ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건 좋죠."
약속을 잡으면서 J와 몇 개 안 되는 역을 사이에 두고 6호선 라인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로 나들이 오겠다면서 동네 단골 카페로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일요일 오후 3시에 망원동에서 J를 보기로 했다. 어수선하지 않고 오래된 느낌의 동네 카페 한 곳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