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
만사마다 "안다"는 것이
날숨 정도의 무게가 되어
지천에 널려있소
참새를 "안다"는 것으로
무지한 새의 모가지를
비틀어 꺾지 마오
"안다"는 것을 알지만서도
모르는 것을 알지는 못하니
"안다"는 것도 모르게 하시오
무지의 존재로 태어나
대착점에 다다를 수 없으니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보다
결코 가벼워서는 안 되오
전지(全智)의 정상에 다다를수록
"안다"는 것은 무거워져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안다"가 아닌 "알고 싶다"는 것
사랑의 시작이 그 안에 있소
- 삼류작가지망생
"나도 겪어봐서 다 알아. 힘들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아는데, 별 거 아니더라."
"네 맘 다 알아."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를 시작해보려고 한다는 나의 말에 직장상사는 "내 주변에 작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아는데"로 운을 떼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그 친구도 지금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다른 친구도 신인 소설상을 받았는데 이후로 작품이 나와도 관심 못 받고 그냥저냥 힘들게 지내고 있다, 20분이라는 긴 대화 끝에 맺어진 결말은 작가란 어려운 길이니 직장인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라는 조언이었다. 언제부터 '안다'는 말이 이렇게 값싼 조언과 위로의 표현이 된 걸까.
생각해보면 '안다'는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는 말이다. 내뱉는 것 자체가 논리적 오류가 많다. '안다'는 것은 무지의 범위를 상정하지 못하는 현재의 인지 범위다. 특정 지어 물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지하기 어렵다. 또한 아무리 잘 아는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지식의 결점은 꼭 있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서 새로운 정보를 갱신하지 않으면 그저 잘 알았던 영역이 된다.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안다'의 여집합 영역만 관심을 가졌을 뿐, 제 그룹에 속한 지식의 파편들이 낡고 오래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기호 삼각형이라고 중고등학교 국어책 첫 단원에 단골로 등장하는 녀석이 있다. 상징(Symbol), 사고(Thought), 지시물(Referent),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삼각형이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상징(언어)은 지시물(현실 속 대상)과 곧바로 연결되지 않으며 사고(개념, 관념)라는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 책상 위에 있는 꽃을 가리키며 "꽃"이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곧바로 눈에 보이는 꽂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 속에서 '꽃'을 떠올린 뒤 인식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최종 목적은 서로 뜻이 통해 오해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많은 류의 오해와 갈등은 서로의 사고 영역이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상징과 지시물로만 판단할 때 일어난다. 잘생긴 사람이 지나갈 때 A가 "저 사람 매력 있지?"라고 물었고 B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A는 "넌 눈이 너무 높아"라며 타박한다. B의 매력에 대한 기준점은 물어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섣불리 "안다"는 표현을 사용해 상처를 주고 오해를 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인정했다. 나는 "모른다"고. 상대방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만이었다.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분석해도 작은 무엇 하나 온전하게 알 수 없다. "안다"가 아닌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그래서 서로의 언어가 가지는 생각의 온도를 맞춰나가는 것. 소통방법이 언어밖에 존재하지 않는 관계의 저주 속에서 소박한 위안 위에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