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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Jul 06. 2023

걱정의 얼굴에 대하여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일까, 걱정된다는 말이 달갑지만은 않다. 

 ‘당신이 걱정됩니다.’보다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 믿음은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한 것일까, 상상하게 된다. 


     

 걱정의 얼굴은 묘하다.

 애초에 걱정이라는 게 ‘좋지 못한 일’이 전제가 돼야 성립되는 말이지 않나.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걱정의 대상이 곤란한 상태에 처하고.     



 이런 관점에서 ‘걱정’은 두 가지의 커다란 뼈대로 생겨나는 마음 같다.

 하나는 안 좋은 일을 미래에서 현재로 당겨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일로 인해 상대가 힘들어질 거라 예상하는 것이다.


 이 중,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역시 두 번째다. 그것은 나를 믿지 못해서 걱정하는 얼굴이다. 

 ‘네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혹은, ‘네가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걱정의 얼굴. 불신은 종종 쉽게 확장된다. 불신의 확장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네게 그런 안 좋은 일이 생겨서는 안 돼’ 그러니까, ‘내 의견에 따라’


   

 나를 걱정하는 건 대체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걱정과 사랑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또한, 걱정과 믿음 역시 다른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걱정 어린 표정이 못내 씁쓸하게 서운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나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마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신이라면 괜찮다는 신뢰에 대해서. 혹은 당신이 무너지고 고통스러워해도,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괜찮다고 쓰다듬는 손길에 대해서.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아마 불가능하겠지. 걱정하지 않는 타인의 얼굴을 보는 건.

 그렇다면 조금 바꾸어서 내가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 내가 나를 온전하게 믿는 건 가능할까. 아니, 남에게 바라는 주제인데도 역시 나 스스로에게도 그런 초현실적인 믿음을 주지 못한다. 나는 자주 상황을 의심하고 곧잘 불안해하고 종종 걱정하고 마는 성향이니까.


 거울을 본다. 그럼에도, 그저 바람이라면, 당신네의 걱정의 얼굴보다 걱정하지 않는 얼굴을 더 자주 보고 싶다. 믿음을 구차하게 갈구해서라도. 나 역시 당신들을 걱정하지 않아 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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