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인마' 너 어떤 사람까지 마안나 봤니?
엔젤스(Engels)
강준상이나 A씨의 직속상관과 같은 이들은 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까. 또 중견 판사가 말한 것처럼 결정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의 30~40대가 유년 시절을 1980~90년대의 사회상을 꼼꼼히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왜 그들이 엘리트 마마보이가 됐는지 말이다. <SKY캐슬 같은 엘리트 마마보이① 참고>
19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B씨는 그 당시 입주 과외를 했다. 형식적으로는 하숙생으로 속여 과외 학생의 집에 들어간 후 사실상 그 집 자녀들의 학습 지도를 맡았다. 당시 그의 수입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등록금을 전부 내고 남은 돈으로 적금까지 넣었으니 웬만한 샐러리맨 못지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사교육을 전면 금지했다. 당시엔 현직 교사가 개인 교습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들을 포함해 학원 강사부터 대학생까지 모든 형식의 과외를 못하도록 막았다. 그 당시 학원가에선 학원수강료를 돌려받으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소위 잘 사는 집은 B씨와 같은 명문대생을 하숙생으로 속여 과외를 시켰다.
그러다 사교육 금지 조치가 풀린 것은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이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90년대와 구분되는 80년대 학생들의 가장 큰 특징을 민주화 운동으로 꼽지만 더욱 큰 특징은 사교육의 유무다. 지금의 40대는 어릴 때부터 학원과 과외에 익숙하다. 학원 한 두 개 쯤 다녀본 경험들은 모두 갖고 있고 엄마들의 ‘치맛바람’도 겪었다.
30대로 내려가면 이런 특징은 더욱 심해진다. 부모가 계획한 대로 아이를 사교육에 맡기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마보이’라는 표현이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부터다. 1994년 ‘아라비안 나이트’로 가요톱10 1위에 올랐던 가수 김준선은 2집에서 ‘마마보이’라는 곡을 발표해 인기를 모았다. “아직까진 너에겐 모든 일에 엄마가 필요해”라는 가사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 이후엔 이미 성년이 된 마마보이가 많아지면서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여겨졌다. 대학교수 C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강신청까지 엄마가 해주는 학생도 많아요. 나중에 성적이 나오면 이의신청하러 부모님을 대동하고 오는 경우도 있고요. 심지어는 학군단(ROTC) 활동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자 엄마를 데리고 따지러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마마보이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과 시대의 변화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금지됐던 사교육이 풀린 것과 더불어 90년대는 너도 나도 대학에 가던 시기였다. 실제로 70~80년대의 대학 진학률은 20%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대폭 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70%다. 전에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 공고·상고로 가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엔 모두가 대학입시에 ‘올인’ 하기 시작했다. 80년대까지는 대학에 가려는 일부의 학생들만 몰래몰래 사교육을 받았다면, 90년대 이후엔 그런 학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면서 사교육 시장은 엄청난 성장을 했다. 특히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이 졸업 후 속속 학원가로 뛰어들었다. 또 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청년들 역시 사교육 시장으로 흡수됐다. ‘인재’가 모이며 좋은 사교육 상품도 많이 생겨났다.
규제가 풀리고 공급과 수요가 많아지니 사교육은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 한국의 GDP는 크게 늘었다. 소득에서 필수 생활하는데 쓰는 비용을 제외한 ‘가처분소득’이 급격히 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80년 1704달러에서 90년 6516달러로 4배로 성장했다. 반면 이 시기 한 가정의 자녀들은 1~2명인 경우가 많았다. 10년 사이 네 배나 잘 살게 됐는데 아이들 숫자는 줄었다. 그 만큼 한 명의 아이에게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돈은 고스란히 사교육으로 흘러갔다.
<SKY캐슬 같은 엘리트 마마보이③>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