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며칠 전 딸아이가 갑자기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다 같이 과일을 먹으면서 가족회의를 하자고 말이다. ‘잉? 갑자기 웬 가족회의?’ 하며 의아했지만, 지난번에 했던 가족회의가 나름 재미났었나 보다 했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목욕하고 잘 준비를 마친 다음 가족회의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의 ‘가족회의‘라는 말을 자기 전에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여겼다.
내가 보아왔던 가족들 중에서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저런 부분은 좀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가족회의‘를 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가족회의를 한다는 그 가족들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부모자녀 관계가 꽤나 건강해 보였고, 그 방식이 조금씩 달라도 ’가족회의‘라는 부분이 그 건강한 관계에 크게 일조했을 거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추측이지만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아니, 몇 주 전이었던가?)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가족회의’라는 것을 해보았다. 그때는 사실 ‘가족회의를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했다기보다는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면 좋겠다는 부분이 있어 남편이 얼결에 가족회의를 소집했던 것이었다. (회의라기보다는 담소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명색의 첫 ‘가족회의’였는데, 아무것도 기록해 놓지 않았던 것이 아쉽다.) 사실 늘 ‘가족회의‘에 대한 로망은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가 막연해서 적당한 때를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첫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다. 기록해 놓지 않아서 정확히 무슨 얘기를 나눴었는지 이야기할 순 없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달려 있지 않아서, 주말에 하루정도만 TV를 꺼내와 연결하고서 아이들과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이 루틴 아닌 루틴처럼 잡혀 있었다. 그런데 첫째가 남편에게 주중에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 요구사항은 꼭 아빠한테 말하더라 ㅎ) 주말에는 이러저러한 일정들이 많아, 영화를 보지 못할 때도 많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남편은 그 문제를 두고 가족 모두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얘기를 나눈 끝에 그 주만 주중에 한 번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랬더니 둘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자기는 영화가 아니라 기차 영상을 보고 싶다는 둘째. (둘째는 유튜브로 기차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둘째에게도 주중에 기차 영상을 한 번 보여주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가족회의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회의라기보다는 간단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가족회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도 회의가 습관이 되지 않았었기에 첫 회의 이후 가족회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첫째가 다시 가족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 나는 사실 피곤함에 빨리 아이들을 재우고 싶었지만 ‘가족회의’라는 말에 아이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늦었다는 이유로 아이의 회의 제안을 거절하게 되면, 아이가 앞으로는 자유롭게 가족회의를 제안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쳤다. 그렇게 우린 두 번째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왕 하기로 하고 앉았으니, 딸아이에게 피곤한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종이랑 연필도 준비했다.
그런데 나는 딸아이가 제시하는 안건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TV를 좀 더 보고 싶다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요구사항들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날씨가 제법 시원해졌으니 침대를 다시 원래대로 바꾸는 것(여름동안 너무 더워 에어컨이 있는 안방에 아이들을 재웠었다.)을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고, 더불어 이제 폭염은 지났으니 공원에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싶다는 것과 부엌 식탁 방향, 소파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혼자 화장실에 앉아 대변을 보는 것을 무서워하는 둘째를 위해 동생이 대변을 볼 때 화장실 앞에 인형을 놓아두는 것 등을 제안했다. 아이는 개인적인 바람보다는 정말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사안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아이의 넓어진 시야에 나는 새삼 감탄을 했더랬다. 아직은 아이가 어리니까 가족회의를 아이가 하나의 놀이처럼 여기더라도 내가 잘 이끌어봐야지 했던 나의 생각이야말로 어린 생각이었다. 아이는 남편에게도 안건을 이야기해보라며 회의 진행을 하기까지 했으며, 더불어 남편도 아빠 회사를 다 같이 방문해 보는 것이라던가 사용하지 않는 드럼을 처분하는 문제들처럼 (이야기해보아야 하지만 급하지 않은 문제라 늘 미루고 만 있던) 중요한 안건들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회의는 정말 아이들의 개인적인 바람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우리가 들어주는 수준이었지만, 그 과정 안에서 아이는 자신의 의견이 가족 안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험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번째는 아이가 직접 가족회의를 제안하게 되었고, 아이는 좀 더 다양한 사안들을 고려해 보는 자세를 갖추고 나아왔다. 지금까지는 가정 안에서 결정해야 하는 사안들을 남편과 둘이 결정해서 진행하는 형태였다. 그것도 사실 남편과 둘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제대로 ‘대화’를 한다기보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둘 다 깨어있을 경우 잠깐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낮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후다닥 당장 급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늘 쫓기듯 했고,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급하게 문제들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가며 차근차근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우리는 세 번째 가족회의를 했다. 지난번 회의를 기록하는 내 모습을 본 첫째는, 이번엔 자기도 노트와 연필을 들고 앉았다. 이렇게 성장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뭉클하다. 사실 아이는 진작부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안되어있었을지도… 지금부터라도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럼 그 안에서 아이는 더욱더 깊고 큰 생각을 하리라 믿는다. 아직은 가족회의 중에도 비행기 장난감을 가지고 와 놀면서,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안건을 제시하는 둘째지만, 그런 둘째도 우리가 계속해서 마음을 열고 들어준다면 더 멋진 생각들을 나눠주리라 믿는다. 더불어 이 가족회의가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멋진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덕분이었다. 어떠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아이가 같이 이루어 주고 있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 한 사람의 마음만으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다 잘 밤에라도 가족회의를 제안해 준 네게 고맙다. 그리고 첫 가족회의 를 제안해준 남편에게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