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서러움
근로자의 날. 아이들도 재량휴업일로 학교랑 유치원을 가지 않는 날이었고, 남편도 출근을 하지 않아 온 가족이 집에 함께 있었다. (쉬는 날이었지만, 엄마이자 가정주부인 나로서는 쉬는 날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저녁에 아이들과 어린이날 선물을 고르러 마트를 걸어가고 있는 길이었다. 어느 식당에 적힌 문구를 본 첫째가 질문을 했다. “시그니처가 뭐야?” 식당에 적힌 ‘시그니처 메뉴‘라는 문구를 보고 질문을 한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대표되는 것이라는 뜻인데, 제일 잘하고 자신 있어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첫째에게 “가을이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그중에서도 많이 그려서 제일 잘 그리는 그림은 뭐야?” 하고 남편이 물었고, 아이는 “쿠로미!”(아이가 좋아하는 산리오 캐릭터)라고 대답했고, 남편은 “그럼 가을이 그림의 시그니처는 쿠로미라고 할 수 있는 거야”하며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의 시그니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 아빠의 시그니처는 뭐야?“ 했더니, 남편이 자신 있게 ”아빠는 요리!“ 라고 답했다. 그러다 첫째가 나에게도 물었다. “엄마의 시그니처는 뭐야?” 그래서 나는 ”음… 엄마의 시그니처? 많지이?“ 하면서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데, 아이가 대뜸 “돈 버는 거?”하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아이의 말에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남편이 먼저 “그건 엄마가 제일 못하는 거”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돈 버는 거?”하고 물었을 때 나도 좀 당황하기는 했었다. 나는 전업주부라 돈을 벌어오지는 않는데, 아이가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 의아스럽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의아함도 잠시, 뒤이은 남편에 대답에 나는 순간 확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돈을 벌어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제일 못하는 거‘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었나? 나는 진짜 돈을 벌어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의 이 모든 노동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노동은 그 가치를 어떻게 매길 수 있는가? 갑자기 수많은 질문들이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나는 남편의 그 대답이 마치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여겨져 혼자 갑자기 씩씩 거리기 시작했다.
“가을아! 엄마는 일하고 돈을 받지는 않지만,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아빠는 죽었다 깨어나도 애를 못 낳지만, 엄마는 두 명이나 낳아서 기르고 있어! 그건 정말 위대한 일이야! 아빠가 고작 회사에서 하는 일보다 훨씬 더!” 나도 남편이 하는 일을 그렇게까지 무시하듯 발언을 한 것은 옳지 않았다 생각한다. 그러나 화가 나는 걸 어쩌랴! 그러게 왜 내가 돈 버는 걸 제일 못한다고 했어 왜! 돈 버는 게 얼마나 대수길래! 돈 버는 너는 뭐 얼마나 대단한데!! 뭐 얼마나 대단하게 벌어오는데!!!
결국 내 시그니처는 얘기도 못하고, 나는 씩씩거리다 대화가 끝났다. 나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말 때문에 화가 나있었다. 나중에는 그가 자기 시그니처를 요리라고 한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는 요리를 잘하지도, 자주 하지도 않는다. 그냥 먹는 걸 좋아해 요리에 관심이 있고, 종종 하는 정도다. 그런데 너의 시그니처가 요리라고? 근데 나더러는 돈 벌어오는 걸 못한다고?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전업주부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이것이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힘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이 노동을 밤낮없이 하고도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돈을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직장을 다닐 때도 월급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는데 그 대가가 금전적으로는 전무하다는 것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나의 선택에 의해 시작한 일이니 그마저도 내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고, 반대로는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우리 식구가 먹고살 수 있다는 데에서는 감사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나의 노동의 가치가 자꾸만 평가절하 되는 것 같아 속상하다. 돈을 벌어야만 그 노동이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 따라 그 노동이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전업주부라 하면 쉽게 ‘집에서 논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업주부는 돈을 버는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논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노동의 가치는 쉽게 돈을 벌어오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놀지 않는다. 내가 하는 노동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맡긴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내 남편의 월급을 다 주고도 고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남편이 회사에서 벌어오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만한 노동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근로는 하지만 근로자는 아닌 것이다. ‘네이버’에 ‘근로’라고 검색해 보니 어학사전에 이렇게 나온다. ‘부지런히 일함‘. 나무위키는 ‘근로자‘를 ‘근로기준법상 근로 계약에 따라, 자신의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급료를 받는 피고용자를 말한다.’고 했다. 나는 분명 부지런히 일했는데, 이상하게 근로자는 아니다. 근로는 하지만 급료는 없다.
근로자의 날. 그래서 남편은 회사를 가지 않고, 첫째는 학교를 가지 않고, 둘째는 유치원을 가지 않고 쉬는 날.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더 바쁘고 정신이 없다. 집안일을 하다 두통약을 한 알을 먹었다. 왜 근로자의 날이라고 쉬는데, 나는 근로 스트레스가 더 심한 거죠? 왜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