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꿈이 시인이라기에 나는 시집을 건네주었다.
언젠가부터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자기 장래희망은 ‘시인‘이라고 했다. 사실 시인 말고도 되고 싶은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시간에 자기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집에 와서 나에게 그랬다. “엄마! 내가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시인이라고 했는데, 친구들이 다 시인을 모르더라?” 상황을 들어보니 장래희망을 발표하고 나서 반 친구들이 첫째에게 와서 시인이 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한둘이 아니었던가보다. 아이말로는 반 아이들 모두가 와서 물어봤단다.
그런데 나도 아이의 그 장래희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는 시를 써본 적도 없고, 주변에 시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꿈을 시인으로 갖기로 한 것이었을까? 자기 전에 아이에게 동화책 대신 시집을 읽어줬던 때가 있긴 했다. 그때 말고는 특별히 시를 접해본 적도 별로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내 아이야 말로 ’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아이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시인을 꿈꾸는 것일까?
“가을이는 ‘시‘가 뭐라고 생각해?”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거?” 아이가 말끝을 흐렸던 탓일까, 아이가 대답한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이런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거기에 덧붙여 나도 ’시‘가 무엇인지 아이에게 설명해주려 했으나 횡설수설이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걸 짧은 글로 표현하는 거야”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의 대답보다 더 나은 답변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나는 시집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책장에 마침 시집이 한 권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었다. ’충만한 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이에게 그 시집의 몇 개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며 시는 이런 것이라고, 이런 짧은 글이라고 보여주었다. 아이는 그 책에 흥미를 보였다. “내가 가져가서 읽어도 돼?” 하기에 “당연하지!” 하며 얼른 시집을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잠깐!”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라면 아이에게는 ’질문의 책’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도 좋아해서 책에 직접 필사를 하기도 했던 책이다. “’충만한 힘‘을 읽기 전에 ‘질문의 책‘을 읽어봐! 이 책은 시인이 계속해서 질문하는 시를 쓴 책이야!” 나는 얼른 커다란 책장에서 그 시집을 찾아왔다. 아이는 학교에 가져가서 이 책을 읽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아주아주 짧은 시들이 담긴 시집이고 말이 어렵지 않아, 아이가 읽기에도 무리가 없는 시집이긴 했으나 아이에게 그 시집을 넘겨주고 나서 나는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혀두고 종이가 두꺼운 그림책들을 그 두꺼운 종이 끝이 닳도록 읽어줬었는데. 그때는 같은 책을 계속해서 반복해 읽는 것이 고단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는데. 그래서 7살 말쯤이 되자 아이가 혼자 책을 읽는 것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자기 전에 아이가 골라온 책을 읽어주는데.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아이가 읽는 책, 내가 읽는 책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에게 그 시집을 건네주는 순간은 우리의 책의 경계가 잠깐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내가 읽는,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읽게 되다니. 이것은 아이가 혼자 책을 읽게 되었을 때의 감격과는 다른 뭔가 뭉클하고 울컥하는 감정이 일게 했다. 책을 공유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탯줄이 연결되는 듯한 것이었다. 아이는 나와 연결되었던 탯줄을 끊고 이 세상에 나와 이만큼 크는 동안 점점 내 품을 벗어났지만, 내가 아이에게 시집을 건네는 순간은 마치 나와 아이 사이에 새로운 탯줄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 묘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그 시집을 어떻게 읽을까. 일단 재밌다고는 했는데, 그 흥미가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아이의 책장으로 옮겨간 그 작은 시집이 왠지 모르게 특별하다. 그리고 그것이 파블로 네루다라서 다행이다.
시인이 된 아이를 상상한다. 아이가 쓰게 될 시들을 상상한다. 문득 일기장에 곧잘 시를 쓰곤 하던 초등학생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들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댓글을 달아준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난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내 아이도 그렇게 될까? 사실 아이의 꿈은, 장래희망은 무척이나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나의 이런 상상 또한 금방 휘발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럼 어떠랴. 5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는 ‘아직‘ 시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아직도 종종 시를 쓴다. 내 아이도 종종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 그게 시인이던가?
어제 아이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더니, 그 위에 시를 썼다. 아이의 첫 시다. 꿈이 시인이라고 말하던 아이는 마침내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의 탯줄이 꿈틀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