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새미 Mar 30. 2022

‘100일의 기적’은 없다.

흔한 육아맘의 통잠 고군분투기.

100일의 기적. 대체 누가 만들어낸 말일까. (애 안 키워본 사람일 거라고 감히 추측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아기가 태어나 100일이 지나면 ‘통잠’을 자게 되고 고로 밤중 수유도 끊게 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말 ‘100일의 기적’.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 이 말은 그저 희망고문일 뿐이며, 가뜩이나 힘든 육아맘들에게 괜한 자괴감만 안겨주는 나쁜 말이라고. 마치 대부분의 아기들이 100일이면 통잠을 자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이 말은, ‘참’이 아닌 ‘거짓’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 주변만 해도 그렇다. 내가 아는 많은 육아 맘들과 아기들이 있지만 그중 100일의 기적을 경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주변 아기들만 ‘예외’라고 하기에는 그 인원 수가 너무 많다. 즉 다수는 100일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죽하면 ‘100일의 기절’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100일의 기적을 기대했지만 통잠은커녕 오히려 신생아 때보다도 못한 수면의 질로 퇴행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100일의 기적’을 비꼬는 ‘기절’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기절은 말뿐인 것이 아니다 진짜 기절할 지경이다.) 나는 오히려 ‘100일의 기절’이 더 ‘참’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게 더 현실에 맞는 말이므로 오히려 그 말이 널리 통용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기들은 100일이 지나고 뒤집기를 시작하고, 이가 나기 시작한다. 자다가 뒤집고 싶은데 뒤집지 못해서, 혹은 뒤집어서 울면서 깬다. 이앓이의 경우 증상이 더 심하다. 이유 없이 자주 깨고 무얼 해줘도 울고 보챈다면 이가 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잇몸을 뚫고 이가 나는 것이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심한 경우 열이나며 앓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잠을 잘 잘리 만무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가 한 두 개 나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는 계속해서 나고, 그 개수는 생각보다 많다… 그러니 100일의 기적이 왔다가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내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월급처럼… 왔지만 온 게 아닌 것이랄까…


내 아이들도 그랬다. 첫째는 5살(만 3살)인 지금도 새벽에 한 번씩 깨서 안방으로 넘어오는 날들이 허다하다. (5살인데 통잠을 안 자는 날들이 많다는 얘기다.) 100일의 기적? 그런 건 남의 얘기였고 (그 남들도 다 자기 얘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통잠’이란 포기한 지 오래라 기억도 안 나지만 돌이 지나도록 통잠을 자지 않았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둘째는 좀 다르려나? 했지만 역시나. 100일의 기적은 오지 않았다. 딱 하루, 정말 기적처럼 통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기적보다는 ‘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할 수 있겠다. (아이 이름은 ‘여름’이다.) 딱 하루 밤으로 끝난 통잠은, 이앓이 인지 성장통인지와 함께 끝이 났다. 이앓이였나, 성장통이었나, 사실은 그토록 오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오만 이름을 다 가져다 붙여대서라도 이해하고 싶은 그 시기는 통잠을 기대했던 나 자신을 세차게 비웃으며 ‘기절’의 게이트를 오픈했더랬다.


첫째는 실패했지만, 둘째는 반드시  일찍 통잠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싶은 마음에 신생아 때부터 일찌감치 수면교육에 돌입했다. 안아재우는 것이 아니라 울더라도 참고 혼자 누워 자는 습관을 길러주고, 자다가 칭얼대더라도 반응해주는 횟수를 줄여 잠이 깨지 않고 계속 자도록 해주라는 어느 소아과 전문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했다.


사실 둘째가  소위 말하는 ‘순한 아이’는 아니라서 적당히 울다 잠드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빽빽 울어대며 오열하는 아이를 안아주지 않고 참고 있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의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가 되어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다가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기가 막히게 듣고 일어난다. (사실 안 듣고 싶은데 들린다.) 나는 한 번 잠이 들면 잘 깨지 못하는 타입이라 남편이 코 고는 소리도 잠들기 전에만 무척 거슬리지 일단 잠이 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기 울음소리는 방 문을 닫고 자고 있어도 잘 들린다. 그렇게 설계된 몸인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스트레스 지수는 미친 듯이 치솟아 예민해지게 되고, 이성이 흐려져 판단이 어렵다. 이게 과연 맞는 방법 인가하는 고민인지 화인지가 솟구치는 것을 억누르는 게 더 힘이 든다.


그렇게 울리고 또 울리는 날들이 지나고 어느 정도 수면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이는 4~5시간에서 6~7시간, 어떤 날은 7~8시간 연속으로 자기 시작했다. 이대로 쭉 자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면 정말 통잠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조심스럽게 ‘100일의 기적’을 꿈꿔 보기도 했다. 그리고 169일. (100일에서 정말 한참이 지난 시기이긴 하지만) 아이는 정말 기적처럼 통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육아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할리 없었다. 원더 윅스(아기가 정신·신체적으로 급성장하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성장과정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평소보다 더 많이 울고 보채면서 부모를 힘들게 하는 때를 일컫는다. _네이버 지식백과)도 왔고, 이도 나기 시작했다. (이사도 했다.) 너무 심하게 오래 울며 힘들어할 때는 몇 번 안아 재우기 시작했다가, 부모님이 집 인테리어 공사로 우리 집에 한 달가량 함께 지내게 되시면서 (즉, 안아줄 어른이 두 사람이나 더 늘어나게 되면서) 안 아재 우는 날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든 습관이 그러하겠지만, 만들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아이는 이제 안아재우는 것이 아니라면 잠을 자지 않겠다는 식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눕혀 재울라치면 죽어라고 울어댔다. 1시간 넘게 우는 것을 듣고 있을 바에는 10분 안아주고 재운 다음 나도 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딱 좋았다.


아기들은 생각보다 매우 똑똑하다. 내가 울면 맘이 아파 금방 안아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귀신 같이 안다. 고로, 울면 안아준다는 공식이 성립해 버리게 되었다. 소의 말해 ‘손을 타게’ 된 것인데,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자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혼자 누워 자는 습관은 금세 안 아자는 습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한동안은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안겨서는 훨씬 쉽게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줄었고, 재우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 하지만 그 습관은 유지나 발전이 아닌 퇴행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아이는 점점 더 안겨서만 자려고 했다. 안겨 잘 때도 누워 안기는 게 아니라 세워서 안겨있고 싶어 했고, 잠이 깊이 들어 (입에서 쪽쪽이가 빠 질정도) 내려놓아도 얼마 못 가서 깨기 일쑤였다.


수면방법만 퇴행하는 게 아니라 수면 시간도 단축되었다. 아이는 결국 1~2시간마다 깨서 울어댔고, 그 울음은 다시 안아주기 전까지 강도를 높여가며 계속됐다. 수면시간은 줄지만 몸무게는 꾸준히 늘고 있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남편과 나의 피로도 차곡차곡 쌓여 늘고 있었다.


신생아 때보다 못 자는 지금의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모님이 본가로 돌아가시자) 남편과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안아서 재우지 않는다!” 갑자기 바뀐 방식에 아이는 목놓아 울어댔지만 30~40분을 울고는 잠이 들었다. 수면의 질이 확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깨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끝까지 오열 오열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 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시 우리는 애를 써보는 중이다.


사실 뭐가 정답인지 나는 모른다. (순한 내 조카는 별 애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잠을 잔다.) 그렇기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며칠 전엔 아이를 눕혀놓고 낮잠을 재우는데 계속 오열 오열하기만 하고 당최 잠을 안 자는 것이었다.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속상한 맘으로 생각했다. 신생아 때 울려 재울 때가 힘들긴 했어도 더 오래 잘 잤던 것 같은데  원더 윅스 건 이앓이 건 부모님이 계시건 그냥 그때 그 방법을 쭉 밀고 나갔으면 여름이도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싶은 게 내가 자꾸 양육방식을 바꿔서 애만 고생시키는 것 같고, 괜히 잘 안 자고 예민한 애라며 아이 탓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 마음은 순간 나를 처참히 무너트렸다.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도 울었다. 나의 그 말에 동생은 그게 나았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며 언니는 단지 순간순간마다 열심히 선택한 거라 위로해주었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순간순간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늘 미안해야 하는 걸까. 이 걸해서 미안하고 이걸 안 해서 미안하고, 이러나저러나 무얼 선택하든 간에 후회가 없는 선택이 없다. 육아는 정말 그렇다. 정답이 없어서 어떤 답을 선택해도 내가 선택한 게 오답이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게 육아인 듯하다.


‘통잠’ ‘100일의 기적’ 얼마나 많은 육아맘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던가.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애를 써왔던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아이템을 사고, 얼마나 많은 정보를 검색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가. 그럼에도 좀처럼 가질 수 없는 기적. 그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기적은 깔끔하게 없는 셈 치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고, 육아를 덜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하면 통잠 자더라 하는 희망고문보다 아이 셋 키우는 어느 작가의 말이 훨씬 몸과 마음에 와닿아 위로가 된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정신과 박티팔 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이들의 수면에 대해 저자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 첫 3년은 그냥 제대로 못 잘 각오를 한다. 경험상 통잠을 위한 여러 가지 요법들을 따라 하려는 노력이 더 피곤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동물은 낮에 놀고 밤에 자게 되어있다. 그냥 순리인 것이다. 밤에 환하게 불을 켜 둔다거나 낮에 어둡게 해 두는 헛짓거리만 하지 않으면, 결국 통잠을 자는 날이 별 노력 없이 알아서 온다. 나이가 들어 인간의 신체가 쇠약해져 죽을 때가 오면 또 이렇게 신생아처럼 낮에 자다가 밤에 깨어 있기도 하는 등 수면 주기가 흐트러지는데, 이것도 그냥 순리인 것 같다. 첫 3년, 마지막 3년, 인간에게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기적이 오지 않았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 기적이 언제 올까 초조해하지도 말고, 그냥 3년 제대로 못 잔다 생각하자. 받아들이자. 너무 애쓰지 말자. 100일의 기적이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내염이라는 눈물 버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