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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Mar 14. 2022

구내염이라는 눈물 버튼

한 번 씩 눈물 쏙 빠지게 하는, 육아란 그런 것.

둘째 안고 첫째 책읽어주며 밥먹이기

며칠 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 아픈 걸 걱정하기에 앞서 드는 생각은 그 이름도 지겨운 코로나… 7개월짜리에 유치원을 다니는 5살 첫째도 있으니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약을 사 먹기도 전에 얼른 해본 ‘자가진단’. 다행히 음성이었다. 일단은 안심이다. 그리고 약국에서 사다 먹은 목감기약. 며칠을 먹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픈 듯도 하다. 그러니 다시 밀려드는 긴장감. 얼마 전 동생의 친구도 인후통이 있어서 자가진단을 해보았는데 음성이 나왔음에도 쎄한 마음에 병원에 가서 돈을 내고 pcr검사를 받았는데 양성이었다는 얘기와 여기저기 확진자 소식에 코로나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까지. 나도 이랬는데 양성이 나오면 어쩌지… 하면서도 정작 걱정이 되는 건 내가 아닌 아이들. 게다가 매일 만나는 조카들까지… 나 하나 걸리면 동생네, 친정부모님까지 모두가 비상이 걸린다. 오늘은 토요일. 주말이다. 애 키우는 엄마들은 공감할 테지. 평일보다 무서운 주말. 그야말로 폭풍 같은 토요일을 보내고 겨우겨우 아이 둘을 재운 뒤 아무래도 목이 너무 아파서 비타민을 탈탈 털어 넣고 그냥 호기심에 한 번 들여다본 내 목구멍.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들여다보고는 경악을 했다. 목구멍 근처에 떡하니 하얗게 자리를 잡은 저것은 망할 놈의 구내염. 나는 피곤하면 구내염이 잘 나는 편이라 참 다양한 스폿의 구내염을 경험해 보았지만, 그중 최악을 꼽으라면 단연 목구멍에 난 구내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상처가 어떤지 모를 때는 차라리 덜 아프고 덜 서럽다가, 그 상처의 실체를 보게 되는 순간 진짜 아픔이 찾아오는 듯하다. 갑자기 구내염을 보는 순간 목구멍이 더더 아프기 시작한다. 헥사메딘으로 가글을 하고 스프레이형 프로폴리스를 마구 뿌려댔다. 아프타치를 붙여보려 했지만 너무 깊숙이 위치해 있어서 도저히 불가능. 결국 아프타치 한 개를 버리고, 알보칠을 꺼내온다. 구내염이 잘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그 약. 바르면 (너무 아파) 브레이크 댄스를 추게 된다는 그것.  어쩔 수 없이 나는 알보칠을 선택해야만 했다. 면봉에 약을 묻혀 구내염에 갖다 대는 순간. 딱 3초 뒤에 찾아오는 고통. 약을 바른 부위에 혀가 닿을 까 봐 입을 아 벌리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아프다. 일단은 아파서 울었다. 너무 아프고 아픈 게 서러워서 울었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그렇게 상처를 마주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그리고 그게 못내 서러워 자꾸만 울었다. 몸에 무리가 오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았음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육아란 그런 것. 하루 이틀 좀 쉬고 다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픈데도 내 몸 보다 가족들 걱정에 전전긍긍했다는 것이.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았으면 금방 알았을 것을 그럴 정신도 없이 그저 목감기인 줄 알고 며칠 동안 목감기 약을 성실히 사다 먹었다는 것이. 구내염이 이렇게 커지도록 미련하게 참고만 있었다는 것이. 그 모든 것이 다 서러웠다.


어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사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주말에 친정엄마가 말해주어 알게 된 결혼기념일. 아마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남편도 나도 꿈에도 모르고 지나갔을 날이다. 알고서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느냐는 말을 서로에게 농담처럼 던지며 웃고, 아이 둘을 재운 뒤 맥주잔을 부딪히며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주는 것. 애둘육아는 결혼기념일의 풍경을 그렇게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서운함은 없다. 남편도 나도 결혼기념일을 준비할 여유는 없었다는 걸 서로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참, 그것도 서운하지 않았는데 구내염 하나에 이렇게 서러움이 폭발하다니.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 법. 몸이 무너졌는데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리 없다.


오늘은 내가 둘째를 남편은 첫째를 재우기로 하고 각자 방에 들어갔다. (첫 째, 둘째가 각각 다른 방에 잔다.) 잠귀가 밝고 졸릴 때 유독 예민하게 구는 둘째를 겨우 다 재워가려던 그때. 눈을 꿈뻑꿈뻑 느리게 여닫는 아이를 보며 이제 거의 다 됐다 싶었는데, 첫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엄마랑 자고 싶단 뜻이다.) 그 바람에 둘째가 눈을 번쩍 뜬다. 망했다. 문 닫고 나가라는 말에 첫째는 울음이 터졌고, 애 재우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첫째가 이 방에 들어오게 놔둔 남편이 원망스럽다. 다시 둘째를 겨우 재우고는 지친 몸을 누이려는데 첫째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린다. 남편이랑 다시 잘 자는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결국 거실로 다시 나온 첫째를 데리고 방에 같이 들어간다. 엄마랑 자고 싶었다며 울먹거리며 내 팔을 안는 첫째 옆에 누워 남편을 다시 한번 원망해 본다. 그렇게 첫째도 재우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애 둘 잠 한번 재우는데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내 목구멍 들여다볼 시간이 있었겠나. 몸속 어딘가도 아니고, 입을 아 벌리면 보일 곳에, 그 좁디좁은 내 입 안에 난 염증 하나도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게 서럽다는 건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서러움인 것이다. 아팠으면서도 나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 애 둘 돌보는 게 일이라, 그게 먼저라, 그걸 하고 나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나를 돌볼 시간과 에너지는 없는 것. 그게 엄마라는 직업이고, 육아라는 일이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육아 그것 참 쉽지 않다. 그래서 한 번 씩 이렇게 눈물을 쏙 빼곤 한다. 이번 눈물 버튼은 구내염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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