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새미 Apr 04. 2022

똥고집 속에 숨어있던 진심

어쩌면 내 아이를 제일 모르는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성격이 무던한 편이어서 특별히 힘들게 하지 않는 타입이다. 미운 4살도 없이 5살을 맞이한 지금도 딱히 미울 일이 잘 없다. 웬만한 건 다 어느 정도의 설득과 회유로 해결이 되는 편인 데다, 울음 끝도 짧은 편이라, 속상해했다가도 금방 잊는다.


그래서 그런가, 가끔 들어줄 수 없는 똥고집을 피우면 퍽 당황스럽다. 어제도 그랬다. 유치원 하원 후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길래 함께 놀이터로 향했다. 마침 둘째도 유아 차에서 곤히 잠들었고, 놀이터에서 반가운 친구도 만났기에 즐겁게 놀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늘 짜증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친구와 모래놀이를 하다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간 것이다. 아이가 신고 있던 크록스를 벗겨 모래를 털어주고 있는데, 같이 놀던 친구가 자기는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는 자기도 그 친구처럼 운동화로 갈아 신고 싶다는 것이었다. 에? 지금 운동화로 갈아 신으려면 집에 갔다 와야 하는데? 난감했다. 지금은 운동화가 없으니 오늘은 크록스를 신고 놀자고 설득했다. 다음부터는 유치원에 크록스를 신고 간 날이면 하원할 때 엄마가 운동화를 따로 챙겨 나오겠다고 약속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소 고집을 부렸다. 집에 가서 운동화를 갈아 신고 와도 되지만, 그러면 그 사이 친구는 집에 가고 없을 거라고 상황 설명을 하며 좀 아쉬워도 오늘은 크록스를 신고 놀자고 다시 한번 설득을 해봐도 아이는 징징거리며 알아듣지 못한 말과 함께 포효하기 시작했다.


오늘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는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구면이다. 지난번에 다른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 너무나도 재미나게 같이 놀았던 터라 헤어지면서도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무척 아쉬워했었던 친구다. 그 이후로도 며칠은, 그 놀이터에 가면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놀이터 타령을 했었던 터라 나도 놀이터에 갈 때마다 그 친구가 있는지 살펴보게 됐었다. 그런 친구를 우연히 이 놀이터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분명 무척 반갑고 신났을 텐데, 고작 신발 때문에 친구랑 놀지도 못하고 떼를 쓰고 있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아이는 이런저런 나의 설득과 회유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엔 난감했지만 나중에는 나도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달래도 보고 엄포도 놓아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그 친구는 자리를 뜨고 말았다. 멀어진 그 친구를 뒤로하고 아이는 여전히 생떼를 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결국 둘째가 눈을 뜨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 마음은 한층 더 조급해진다.) 나야말로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운동도 못 가고, 약을 먹으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저녁시간이 다 돼가서 배도 고픈데, 인내심이 오래 갈리 없었다.


결국 나도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계속 이렇게 놀이터에서 징징거리고 있기만 할 거라면 집에 가자고 했다.  아이는 그러면 그 친구가 슬퍼할 거라며 울먹인다. 그게 걱정되면 크록스를 신고 친구와 놀자니까 그건 또 싫단다. 죽어도 운동화로 갈아 신고 싶다는 아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어쩌란 말이냐… 운동화가 어디서 뿅 하고 나타나 주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도 더 이상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뒤로하고 유아차를 밀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는 따라오지 않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버티다가 내가 점점 더 멀어지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도 불편했다. 얼마나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친구란 말인가!! 그 친구를 뒤로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니…ㅠ 신발을 갈아 신고 싶지만 친구와도 놀고 싶은 두 마음의 아이는 얼마나 속상할까 생각하니 나까지 퍽 속상해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더 속상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길에 아이는 또 딴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이번엔 엄마가 좋아하는 그 카페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속상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나는 대뜸 싫다고 했다. 울고 떼쓰는 아이랑은 안 간다며, 가을이 두고 엄마 혼자서만 카페에 갈 거라고 했다. 아이는 길 한복판에서 막 울어댔다. 그러다 울어서 마스크가 젖었다며 마스크까지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건 정말 양보해줄 수 없는 부분이다. “젖어도 어쩔 수 없어! 써야 해!” 버럭 하며 마스크를 다시 씌우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 좋게 놀러 나가서 이게 뭔가 싶은 게 영 기분이 별로다. 아이도 그랬겠지… 아니나 다를까 퇴근해 돌아온 아빠를 보자 얼른 속상함을 토로한다. 아까 엄마가 화를 냈다며 자길 혼낸 엄마는 나쁘다고 이른다. 그러고는 오늘 밤은 아빠랑 같이 잘 거란다. (아이는 원래 꼭 나랑 자려고 한다.) 속으로 ‘그럼 나야 땡큐지’ 했지만, 영 찜찜하다.


정작 잘 시간이 되니, (그 사이 기분이 나아졌는지) 엄마랑 잘 꺼라는 아이. 늘 하던 대로 아이가 골라온 3~4권의 책을 읽어준 뒤, 잠자리에 든다. 나는 아이가 잠들 때까지 옆에 누워 있어 주다 나오는데, 아이가 잠들기 전 아까 낮의 일을 이야기해보았다. 아이는 아까는 엄마가 화를 내서 미웠다고 하면서, 엄마도 가을이가 미웠냐고 묻는다. 되물을 줄은 생각 못하고 있던 터라 잠시 움찔했지만, 아까는 가을이가 울고불고 떼를 써서 엄마도 잠깐 가을이가 밉긴 했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밉지 않다고 했더니, 자기도 지금은 엄마가 밉지 않고 좋다고 하는 아이. 아까는 왜 그렇게 울었냐고 물었더니 운동화로 갈아 신고 싶어서 그랬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다음 말에 나는 아이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랑 못 노는 건 괜찮았는데, 엄마랑 놀고 싶었어”


에? 친구가 아니라 나라구?!! 그 말에 난 또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너무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라 잠시 멍 했다. 얼른 다시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본다. 나는 그저 운동화로 갈아 신고 그 친구랑 놀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친구랑 못 놀게 된 게 나까지 속상할 지경이었는데, 아이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 친구보다 엄마가 중요했던 아이. 기분 좋게 놀러 나와서 엄마랑 다투게 된 게 아이는 더 속이 상했었나 보다. 그깟 운동화가 아니라, 그깟 친구랑 노는 것 때문에 엄마가 화를 냈다는 게 속이 상했었나 보다. 그래서 자리를 뜬 친구보다, 유아차를 밀고 멀어지는 엄마 모습이 더 속이 상했었나 보다. 어쩌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같이 그 카페에 가자고 한 것이 아이 딴에는 화해의 손짓이었나 보다. 저번에 그 카페에서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 생각나 그렇게 하자고 했었나 보다. 그렇게 하면 엄마와의 관계가 다시 좋아질 거라 생각했나 보다. 나는 그런 아이 맘도 모르고 그 말을 단칼에 거절했던 거였다. 아이는 그게 또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엉엉 울었나 보다. 눈물에 마스크가 젖도록 말이다.

.

TV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도 늘 부모가 울 수밖에 없는 부분은,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진심을 들어보는 인터뷰? 시간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아이의 진심을 들은 부모는 거기서 마음을 세차게 얻어맞는다. 유별난 아이 때문에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아이도 같이 힘들었다는 것. 당최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 뒤에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 부모는 눈물을 흘린다.

.

나도 그런 아이의 답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미안하다 말하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내 옆에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잠들기 전 아이와 화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너의 마음을 몰라준 미안함이 밀려든다. 아니 안도감은 잠시, 밀려온 미안함이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 마음은 그렇게 맘 속에 고여 한참을 아린 마음으로 누워있게 되었다. 그 똥고집 속에 이런 진심이 숨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내 아이를 제일 모르는 게 나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누워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오늘의 너를 생각한다. 너는 어느새 또 이만큼 커서 네 말과 행동 뒤에 진심을 숨겨 놓을 줄도 아는 아이가 되었구나. 고 작은 몸으로도 숨겨지는 마음이 있는 거구나. 아니, 고 작은 몸으로는 미처 꼭꼭 숨기지는 못해 삐져나왔던 진심을 나는 왜 몰라주었을까. 나는 왜 너를 다 안다 생각했을까. 왜 네가 내민 화해의 손짓을 나는 차갑게 거절했을까. 이런 나인데도 너는 나를 다시 좋아해 주는구나. 얼마 후에는 나보다 친구들이 훨씬 중요한 나이가 되겠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새삼 또 감동한다. 그리고 그 잠깐 너를 미워했던 나의 옹졸함이 새삼 또 부끄럽다.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어서, 내가 너의 엄마여서 새삼 또 고맙고 감사하다.


다음 똥고집에는 떠올릴 수 있기를... 그래도 저 아이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걸…

(하지만 또 잊어버리고 화를 내겠지…ㅎ)


매거진의 이전글 ‘100일의 기적’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