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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pr 27. 2022

언젠간 다 혼자 하게 되어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못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 킥보드 타고 등원하는 재미에 폭 빠진 가을이

큰 아이는 5살. 3살 때 공원에서 다른 언니 오빠들 킥보드를 너무 부러워해서 사준 킥보드. 사준지는 오래지만 혼자 타지는 못했었다. 늘 엄마나 아빠가 손잡이를 잡고 끌어주면 발을 굴러 타는 식이었다. 직진은 혼자 좀 할 줄 알았지만 방향 전환을 어려워했고,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동네는 언덕에 있는 아파트라 오르막 내리막이 많아 더더욱 킥보드를 타기 쉽지 않았다. 키가 작은 킥보드를 잡아 주는 건 생각보다 허리가 아픈 일이다. 그래서 자꾸만 킥보드를 베란다에 모셔두게 되었다. 게다가 둘째가 태어난 뒤로는 유아차를 기본으로 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킥보드까지 잡아줄 손이 없어 더더욱 모셔두는 날이 늘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5살이 되어서도 킥보드를 탈 때면 꼭 잡아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에 킥보드를 타고 오는 친구들을 보아서 일까, 킥보드로 공원을 누비는 사촌오빠를 보아서 일까 갑자기 킥보드를 타고 유치원에 가고 싶다던 아이. 등원 길에도 나는 둘째 유아차를 밀어야 하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언덕도 없고 유치원도 가깝기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웬걸? 아이가 갑자기 혼자 킥보드를 탄다. 조금이라도 위험상황(?)에 닥치면 얼른 멈춰 세웠지만 잡아달란 말도 안 한다. 앞에서 말한 위험상황이란 건, 계단 대신 이용하는 짧은 오르막이나 내리막, 맞은편에 걸어오던 사람과 가까워졌을 때이다. 그럴 땐 멈춰 세워 킥보드를 끌고 걸었다. 자기 힘으로 안 될 땐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 외에 상황에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별 것 아닌 발전일 수 있지만, 나에겐 여간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동생이 그런다. 이렇게 킥보드를 잘 타는데 왜 못 탄다 그랬냐고. 그러게 말이야! 킥보드를 못 탄다고 말했던 내가 마치 거짓말을 한 것 마냥 갑자기 이렇게 잘 타기 있냐 이 말이다. 하루 이틀은 혼자 타긴 했어도 맞은편에서 누가 걸어오면 미리 멈춰 서서 걱정하더니, 며칠 지나니 유아차를 미는 내가 따라갈 수도 없게 혼자 앞서 달려가 버린다. 방향 전환도 제법 자연스러워졌고, 막 달리다가도 건널목이 나오면 속도를 늦춰 멈추는 것도 익숙해 보인다. 갑자기 혼자 타는 것도 신기한데, 이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는 게 참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동안은 왜 잡아달라고 한 건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랄까...ㅎ 


아이들은 이렇듯 갑자기 성장을 할 때가 있다. 마치 한 단계 레벨업을 해서 다른 캐릭터가 된 것처럼, 피카츄가 라이츄가 된 것처럼, 갑자기 어떤 스킬을 획득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유치원이 끝나면 자주 가던 놀이터가 있었다. 그 놀이터에는 미끄럼틀이 3개가 있었는데, 아이는 그중 한 개만 탈 줄 알았다. 다른 두 개의 미끄럼틀은 그 어떤 설득과 회유에도 절대 타지 않는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딱 한 번만 타보자고 설득도 해보고, 어린 친구들도 타는 걸 보니 무섭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탈 줄 아는 미끄럼틀과 같은 높이에서 내려오는 미끄럼틀들인데, 울먹거리기까지 하며 절대로 싫다는 아이가 의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놀이터에 갈 때마다 오늘은 타려나 싶어 물어보아도 매번 강력한 거부의사를 밝히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곧 죽어도 싫다던 그 미끄럼틀을 오늘은 갑자기 타는 것이다!!! 마치 원래 타던 미끄럼틀이었다는 듯, 이게 뭐 대수냐는 듯 타는 아이를 보며 드디어!!! 싶으면서도 약간 허무하기는 했다. 그동안 엄마가 그렇게 한 번만 타보라고 애걸복걸할 땐 싫다더니... 그래, 너의 때가 되면 네가 알아서 탈거였는데, 엄마가 너무 집착했던 거지? 맞아. 혼자 알아서 다 할 거였는데 난 왜 별것도 아닌 미끄럼틀에 그토록 목메었을까? 참 우습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때가 있고 방식이 있다. 그래서 자신만의 시간과 방법으로 언젠가는 다 혼자 해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것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아이가 하지 못하는 것에 집중하게 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집 둘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뒤집기를 못했었다. 


아이들은 대게 태어나서 누워만 있다가 뒤집게 되고, 그러다 배밀이를 하게 되고, 그러다 기어 다니게 되고, 그러다 혼자 앉게 마련이다. 그런데 둘째가 뒤집을 생각을 안 한다. 5개월부터 늦어도 7개월이면 뒤집는다는데 우리 아이는 뒤집지 않는 것이다. 뒤집지 않으니 배밀이도 기어 다니는 것도 안 한다. 7개월이 되어 혼자 앉는 것, 잡고서는 것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계속 뒤집기는 언제 하나 그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둘째와 비슷하게 태어난 조카와 둘째와 동갑인 친구의 아이들은 이미 다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녔다. 이것저것 만지고 다니는 통에 고민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없는 나는 괜히 그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거였다. 혼자 안고, 잡고 서기도 하니 발달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소아과 선생님의 말에도 '왜 우리 애는 뒤집기를 안 할까?' 그 생각을 놓아버리지 못한 나였다. 그러다 아이는 8개월이 되어서야 뒤집었다. 결국 할 거였는데, 아이가 할 줄 아는 여러 가지 보다 하지 못하는 것 한 가지에 더 마음을 많이 썼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특히, 요즘 같이 인터넷에 육아 정보가 넘쳐흐르는 때에는 발달단계에 따른 상세한 내용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무엇을 하고, 얼마큼을 먹고, 얼마큼을 잔다.'와 같이 정량화되어있는 데이터를 접하고 나면 마음이 어려울 때가 많다. '내 아이는 그걸 아직 못하는데, 그만큼 안 먹는데, 그만큼 안 자는데'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나는 너무도 쉽게 형편없는 엄마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첫째를 키워보니 알게 되었다. 그 정보들은 참고만 해야겠다는 걸. 그대로 다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사실 큰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신경 쓰이는 게 엄마 마음인데 괜히 그런 건 정해 줘 가지고 사람 더 심란하게 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맞을 때가 많다.) 지금은 언제 걷나, 언제 혼자 밥 먹나, 언제 혼자 자나 싶지만 언젠간 다 혼자 하게 되어있다. 반드시. 


하루하루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 곁에서 엄마인 내가 할 일은 아이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다려주다 아이가 마침내 그것을 해내게 되면 그런 아이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것 그게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킥보드에 재미를 붙인 첫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가을아, 어떤 것을 못하다가 잘하게 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데, 가을이가 그걸 해냈네? 킥보드 혼자 타는 거 무서워했었는데 이제 혼자서도 잘 타게 되었잖아. 그거 되게 힘든 일인데~ 가을이 정말 멋지다! 대단해!". 아이는 처음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더니, 뜻밖의 나의 칭찬에 스스로도 대견해진 모양이다. 그렇게 아이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쁨을 느껴보고 조금 더 자기 스스로를 믿게 되었을까? 그러길 바라본다. 


아이들은 매우 자주 무언가를 성취한다. 어쩌다 아이는 못하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갑자기' 같아 보이는 성공 뒤에 아마 아이는 수백 번의 실패를 해왔을 것이다. 실패와 실패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못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모는 아이가 ‘못하는’ 시간들을 같이 기다려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못하는’ 시간도 괜찮을 수 있도록 말이다. 자꾸만 설득하고 회유하고 애태우고 속 끓이지 말고 그 시간마저 즐겁게 기다려 주면 더 좋지 않을까. 내가 미끄럼틀 한 번만 타보라고 설득할 때마다 아이는 그 미끄럼틀을 타지 못한다는 사실을 괜히 한 번 더 자각하게 되고, 거절하며 울먹거리느라 즐겁게 놀아야 할 놀이터에서조차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했던 건 아닌지. 부족한 엄마는 이렇게 또 한 번 반성을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둘째를 친정에 맡기고 첫째와 단 둘이 놀이터에 간 날이었다. 돌봐야 할 둘째가 없으니, 나도 같이 바지를 더럽혀 가며 놀았다. 미끄럼틀도 아닌 경사에서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같이 미끄럼 타고 놀아주었다. 그렇게 같이 즐겁게,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이는 갑자기 못 타던 미끄럼틀을 혼자 탄다. 그랬구나. 난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기다려주면 아이는 언젠간 다 혼자 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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