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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ug 23. 2022

어른아이

아이도 나를 키운다.

얼마 전 일이었다. 첫째만 데리고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가야 해서 주차된 차에 짐을 싣고 있는데, 아이가 우리 차 옆에 버려진 쓰레기를 발견했다. 용기가 설레임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건강음료였는데, 누군가 건강만 챙기곤 야무지게 뚜껑까지 도로 닫아 버려두었던 것이다. 아이는 곧잘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알은 채 했었더랬는데, 그날도 그랬다. 


"어?! 엄마! 누가 여기다 쓰레기를 버렸어요!" 

"아이구~ 그러게! 누가 거기다 쓰레기를 버렸네~ 에이긍... 그럼 안되는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평소와 같은 대답을 했다. 아이는 유치원 등 하원을 하는 길에도 버려진 쓰레기를 발견하면, 일부러 가서 들여다보며 그 물건이 뭔지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쓰레기가 있다고 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픈 지구 이야기를 하며 길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그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동의하는 대답을 하고는 다시 제 갈길을 갔다.


그런데 그날은 아이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 나 이거 내가 주워서 버리고 싶어요~"


약간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스러웠던 마음을 감추고는 얼른 그러라고 동의해주며 아이가 주워주는 쓰레기를 받아 들어 차 한켠에 실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를 태우고 얼른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차를 모는데, 자꾸만 아이의 행동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어지럽다기보단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달까. 사실은 아이가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알은 채 할 때마다 나도 고민이 되긴 했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뭔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쓰레기를 주워다 버리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먼저 그 쓰레기를 주워다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에 아이가 쓰레기를 발견할 때마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아닌데도 옷 속 라벨 때문에 까끌하고 불편할 때처럼 마음 한켠이 까끌거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핑계를 대자면 나는 첫째뿐만 아니라 둘째까지 같이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첫째의 모든 말에 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주기 어려울뿐더러, 그 쓰레기를 담을 만한 봉지나 집게를 상시로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 개인위생을 철저히 해야 하는 이 시기에 쓰레기를 막 줍고 아이들을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아이의 그 행동에 부끄러워졌을까. 나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리라. 네이버에 '어른'이라고 검색하면 어학사전에 여러 가지 뜻이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이러하다.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어른이고, 아이는 어른이 아닌데 그런 아이가 어른인 나에게 자기 일도 아니고 남의 일을 (남의 쓰레기를)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쓰레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버린 것이 아니니 내 책임이 아니고 그러니 내가 치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아이에게 전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나는 딱 그 정도의 어른이었는데, 아이는 그 순간 어른인 나보다 더 큰 사람, 즉 더 많이 자란 사람이 되어 행동했다. 


나는 길가에 쓰레기를 보면 주으라고, 우리가 버린 것이 아니어도 지구가 아프지 않도록 우리가 치우자고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데 아이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어른이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아이가 하게 되면, 아이는 어른을 가르치는 더 큰 사람이 된다. 그럴 때 어른은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뒤통수가 욱신거리고, 온몸이 까끌 거리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아이를 키운다고 말하는 게 맞는가 말이다. 아이가 나를 키우는 것 아닐까? 내가 아이 덕에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아이 덕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아이도 나를 키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방송인 김나영이 털어놓은 육아 고충에 굉장히 공감을 했던 적이 있다. "육아는 매일매일 내가 별로인 사람인 걸 확인하게 한다. 보고 싶지 않은 내 끝을 내가 본다. 공감하는 사람 손." 손이 두 개뿐인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할 수 만 있다면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번쩍 들고 싶은 말이다. 격한 공감이 인다.


특히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지 못하고 화를 내는 나를 볼 때 나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육아는 그렇게 내 바닥을 내려다보게 될 만큼 힘들고 고되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들 덕에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희생을 기꺼이 감당한다던가, 아이에게 더 깨끗한 지구를 남겨주기 위해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된다던가 할 때 말이다. 종종 아이들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화를 내기도 하지만, 아이 덕분에 화를 내지 않게 되기도 한다. 


그날의 나는 아이 덕분에 내가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줍는 일을 했다. 아마도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이가 없었다면 내가 하지 않았을 일일 것이다. 내가 한 일만 잘 책임지는데 급급했던 (아니 그마저도 잘 책임지지 못한 것 같지만) 어른을 더 큰 사람으로 성장시켜주는 이. 그것은 어른이 아닌 아이였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어른 옆에 아이가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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