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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Feb 03. 2023

힘든 날엔 일기를 써야지 별 수 있나.

애 둘 그리고 환자 하나.

오늘 너무 힘들었다.


어제 갑작스럽게 남편이 (한 달 반 전에 수술받았던 부위를) 재수술을 받게 되었다. 입원은 하루였지만 회복하기까지 또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어쩌면 지난번보다 더 오래) 걸릴터였다. 아프고 힘든 건 수술을 받는 남편일 테지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졸지에 나도 동지를 잃었다. 그리고 돌봐야 할 환자 하나를 얻었다. 어제는 그래도 첫날이라 남편 없이 씩씩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애 둘을 재우고는 독박육아를 잘 해낸 나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더랬다. 


문제는 오늘, 아직 코감기가 다 낫지 않은 데다 구내염까지 달고 나는 오늘의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다. 오전에는 첫째 유치원에 가서 한 시간 남짓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점심즈음 퇴원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점심으로 먹을 샐러드를 포장해 와준다음, (내 점심도 포장해 와 먹고 설거지도 하고) 오후에는 둘째를 데리고 세무서와 은행에 들러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반찬집을 들러 저녁에 먹을 반찬들을 사는 일들을 했다. 돌아보니, 여기까지의 일정으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다 소진했던 듯하다. 


첫째의 하원 이후 나는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 둘이 번갈아가며 징징 거리는 것을 받아주기가 버거웠다. 낮잠을 많이 못 잔 데다 여기저기 같이 나다니느라 피곤했던 둘째는 계속 안으라고 보챘고, 유치원 다녀오고 나면 피곤한 탓인지 하원 후부터 초저녁까지 부쩍 짜증지수가 올라가는 첫째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냈다. 어찌어찌 한 시간을 버텼는데, 저녁밥을 차려야 할 시간이다. 아, 갑자기 두통이 밀려오고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슥거린다. 소파에 앉아보았지만 잠시뿐이다. 뭐 때문에 눈물이 터진 건진 모르겠지만, 안아주면 울음이 멈출 것 같다는 첫째가 (아빠가 아픈 탓에 안아주지 못하자) 나에게 왔고, 무슨 요구사항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둘째마저 징징거리며 다가온다. 결국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틀어주고는 저녁을 차리기 시작한다. 그런 나에게 다가와 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다했던 남편은,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억지로 웃기까지 하냐며 버럭 하는 마음이 더 불편한 나에게 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아픈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 상황이 나에게 버거운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는 터라 표정이 굳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숨길 여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린 저녁밥이건만, 둘째가 두 세 숟갈 먹고는 자꾸 고래를 돌린다. 먹기 싫다는 뜻이다. 계속 징징거리던 아이에게 빵이나 음료수로 입막음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물론 본인이 부엌에 들어가 달라고 보채서 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급기야 입에 넣어준 밥을 도로 뱉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다.) 고운 말이 나올 리 없다. 아이에게 빽 소리를 지른다. "너 먹지 마! 굶어!" 차려놓은 밥을 치우고 내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러설 둘째가 아니다. 혼나서 뺑~ 울어놓고도 다시 나에게 매달린다. 결국 아이를 안고 저녁을 먹는다. 이쯤 되면 첫째가 등장할 타이밍이다. 혼자 잘 먹던 첫째도 이내 배가 부르다며 내뺀다.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첫째 남은 밥을 먹여주러 간다. (배부르다면서, 먹여주면 남긴 밥도 다 먹는다.) 첫째를 다 먹이고 돌아와 남은 밥을 먹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다. 이건 그냥 살려고 먹는 거지, 식사의 즐거움이란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전쟁 같던 저녁식사를 마치면, 잔뜩 쌓인 설거지가 나를 기다린다. 설거지라도 좀 즐거운 마음으로 해보자 싶어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괜히 더 들썩거리며 텐션을 올리려 애를 쓴다. 그렇게 설거지가 한창일 때, 첫째가 만들기를 하고 싶다고 온다. 음악을 멈추고 이것저것 만들기 재료를 찾아 세팅을 해준다. 다시 설거지를 하는데 이번엔 장난감이 지겨워진 둘째가 다가와 냉장고를 열라고 성화다. 다시 음악을 멈춘다. 결국 이어폰도 뺐다. 즐거운 설거지는 개뿔, 고무장갑도 안 끼고 설거지를 했다. 애들의 요구사항을 수시로 들어주어야 하니, 고무장갑을 꼈다 벗었다 하는 것도 일이다.


남편이 아이들을 봐주고 있었지만, 아픈 몸이라 그야말로 눈으로 쳐다봐주고 있는 게 전부였으므로 그는 둘째가 첫째의 만들기 재료를 망가트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분노한 첫째를 무조건 편들어주며 진정시키고 만들기를 도와주는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색연필로 칠하는데 삐져나왔다. 동그라미를 그려야 하는데 잘 안된다. 색종이를 잘못 오렸다. 테이프로 붙여야 하는데 똑바로 안된다. 사사건건 짜증을 내는 첫째의 비위를 맞추다 나도 폭발해 버렸다. "김가을! 너 그만 안해?!!! 재밌을라고 하는 만들기에 왜 계속 짜증이야!!! 이리 와!!!" 방에 데리고 들어간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는 동안 나도 숨을 고른다. 이러쿵저러쿵 혼을 내는데 이상하게 내 꾸지람에 내가 자꾸 반기를 들게 된다. '그래 뭐, 재밌게 만들기 하려고 했어도 뜻대로 잘 안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지.' '잘 만들고 싶었는데 망가지면 나 같아도 화가 나잖아?' 그래, 결국 내가 화를 냈던 건 사실 네가 잘못해서라기보다 내가 오늘 힘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내 마음이 그렇게 정리가 되자,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짜증 날 수 있고 화날 수 있지. 그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야. 하지만 짜증 낸다고 만들기가 잘되진 않잖아. 다음부터는 잘 안 되는 건 도와달라고 하면 돼~ 알겠지?" 결국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고개는 아이가 끄덕였다. 그나저나 난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이런 독박육아. 


어찌어찌 만들기를 마치고 이제 잘 준비를 할 시간. 첫째에게 치약을 묻힌 칫솔을 쥐어주고, (스스로 닦고 내가 마무리로 한번 더 닦아준다.) 거실 한 귀퉁이에 쓰러지듯 앉았다. '후...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목욕과 첫째 독후감 쓰기는 과감하게 패스하자...'라고 생각하는 내 앞에 어느샌가 둘째가 와서 서있다. 두 손에는 누나가 먹다 남긴 주스박스(멸균팩에 빨대를 꽂아먹는 주스)가 들려있다. 사실 뭘 들고 있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아이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주스를 힘껏 쥐어짰다. 주스가 터져 나와 내 바지를 적시고 바닥에도 떨어졌다. 짜증을 낸다고 엎질러진 주스가 다시 담길 리 만무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뭐라고 소리 질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밀치고 (쏟아진 주스를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씩씩거리며 젖은 바지를 벗어던지고, 행주를 가지러 부엌에 가서도 아이에게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 쏟은 주스 만지지 말라고. 요즘 귀여워 죽겠는 둘째였다. 새벽에 자다 한두 시간씩 깨서 사람을 힘들게 해도 귀여워서 괜찮다며 웃어넘길 정도로 이뻐하던 요즘이었는데... 그런 아이에게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 저리 흘려놓은 주스를 닦느라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내게 부딪혀, 아이가 넘어졌는데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난 이미 바닥이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첫째 이를 닦이고, 둘째의 젖은 내복을 갈아입히고, 두 놈 다 손발톱을 깎아주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준 다음, 꿈나라로 보내는 일들을 했다. (바닥이어도 할건 해야한다.) 그렇게 아이들 방을 나선 뒤에도, 아까 흘린 주스 덕에 여전히 끈적이는 바닥을 한번 더 닦아내고 나서야 나는 진정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새벽에 아이가 깨서 하는 야간근무는 잠시 생각지 말도록 하자.) 바닥에 떨어져 널브러져 있던 몸과 마음을 샤워를 하며 조금 추슬렀다. 그리고 나는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정말 힘들었으니까. 힘든 날은 일기를 써야 한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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