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발표가 있던 날.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은 내가 아닌 후배가 승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고작 대리에서 과장으로의 승진이었다. 육아휴직에 다녀온 후로 몇 년째 승진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던 나는 이번 승진에 사활을 걸었었다.
회사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했고, 계속해서 자격을 갖추며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내가 '만년대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만년대리들은 하나같이 패배자의 모습이었고, 잔뜩 구겨진 옷차림과 어두운 표정은 열정이나 자신감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승진을 위해서는 보란 듯이 성과를 내고 인정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지난 일년간 임원교육이나 팀장교육처럼상대적으로 중요도 높은일들을 해내면서,내가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해왔다.다행히 성과도 좋았다.연말인사평가에서 팀에서 유일하게 A를 받은 것이다. A는 현실적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고과다. 승진발표 전날까지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던 나는 눈앞의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A인 내가 아닌 B의 승진이라니. 뭔가 한참 잘못 되었다.
겨우겨우 오전 시간을 버틴 뒤 보란 듯이 5일의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내면서도 혹여나 내년 승진심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몇 차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벌써 몇 년째 '승진'이라는 희망고문에 속았으면서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애태우는 내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엔 슬픔이 복받쳐 길에서 엉엉 울었다.
"너는 맞벌이잖아, 얘네들은 외벌이야."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육아휴직에서 복직 후 관리 업무를 하다가, 전공분야인 교육팀으로 다시 발령이 난지 며칠 안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한창 교육계획을 보고 받던 실장님이 나를 향해 불쑥 내뱉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그저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열심히 하라는 뜻이야"라는 애매한 격려의 말로 포장된 그 말은, 그 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가끔씩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맞벌이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워킹맘인 나의 눈치를 살핀 것인지. 그리고 막상 격려를 받았다는 나는 불쾌함을 느꼈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맞벌이'에 내포된 의미가 단순히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가 아닌 '출산한 여성은 책임감이 없다'는 것을 비꼬아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찌 보면 계속된 승진 누락은 워킹맘이 되는 순간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주변의 워킹맘 선배들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능력 있고 성과도 좋았지만 승진에선 자주 제외되었다. 분명 억울하고 분해야 마땅하지만 그 누구도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임신했었으니까', '나는 육아휴직에 다녀왔으니까'라며 애써 당연하게 넘기곤 했다. 지금껏 내가 그랬던 것처럼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승진에서 밀린 워킹맘들은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노력하고, 노오력 하고, 또 노오오력을 하는 경우다.
옆 부서의 친한 워킹맘 선배는 승진을 하는데 꼬박 8년이 걸렸다. 이는 통상 승진연한인 4년에 비해 한참 늦은 승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은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지방 사업장에 자원을 했는데, 6개월 넘게 집에 들어가지 못했더니 승진이 되었다고 했다. 일상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충성심을 증명한 후에야, '옛다' 하며 주어진 보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데이것이 축하해야 할 일이 맞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또 다른 경우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의기소침해하다가 결국 회사를 떠나는 경우다.
실제로 내 주변엔 이런 케이스가 훨씬 더 많았다. 회사를 떠나는 그들은 지금의 나처럼 눈물을 흘렸다.
한 대기업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칼퇴할 때 라거나 월급을 받을 때가 아닌 '내 업무에서 한보 한보 진전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떨 때 가장 불행한가?'라는 질문에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프로세스로 무너졌을 때'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직장인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 성과를 공정하게 인정받는 것뿐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기혼자인지 미혼자인지, 외벌이인지 맞벌이인지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역량이나 성과가 아닌 처지와 형편을 고려한 승진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일터에서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회사에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상황을 겪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그 회사의 수준이고 조직의 문제이지, 결코 나의 능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결코 패배자인 것처럼 지낼 필요가 없다.
나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승진 발표 후 가장 힘들었던 건 자꾸만 스스로가 능력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그러한 자기 비하는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주변의 눈치를 보게 만들어 안 그래도 괴로운 마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나는 이 일에 적합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전문가라고 되뇌는 것이다. 승진과 업무성과와는 애초부터 관련이 없는 일이었으니 이 일로 주눅 들지 말자는 의도다. 거울을 보며 잔뜩 구부정한 어깨를 펴고, 내가 가진 립스틱 중 가장 밝은 컬러를 꺼내 발라보았다. 전보다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 내친김에 질질 끌던 로퍼 대신 책상 밑에 처박아둔 하이힐로 갈아 신으니 걸을 때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다음으로 했던 일은조직장에게 나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요청하는 것이다. 또다시 내게 내년 승진심사를 운운하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열정과 헌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지금껏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조직이라면, 앞으로도 인정받기는 힘들 것이다.
누구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며 역할과 책임이 먼저 부여되고 누군가는 정당한 보상 없이 계속해서 실력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면, 그저 상급자의 일을 대신해주는 호구가 된다. 내 직급에 맞는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묻고 그에 맞는 업무범위를 정하는 것. 그것이 호구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의 신미경 작가는, 잘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방식이 '일에 거리를 두는 법'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승진 발표가 있고 얼마 후 틈틈이 써온 글을 모아 출판사 몇 군데에 투고를 했다. 패배자의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했던 일이었는데, 검토를 요청한 네 군대의 출판사 중 세 군데에서 긍정적인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전과 다른 자신감이 차올랐다. 돌파구가 생겼다는 것. 더 이상 회사에만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실실 웃음까지 났다.
나는 여전히 승진이 하고 싶다.
지금 하는 일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렇기 때문에승진을 해서 인정받고싶은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전처럼 승진만을 위해 절박해져서 애쓰지는 않을 것 같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이 인생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명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회사와 나의 삶을 분리해 바라보게 되었다.
몇 차례의 승진 누락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다.
때론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노력에 대한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엔 상처가 난다. 그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또다시 맹목적으로 달려들면 몸이 지치고, 스스로를 탓하며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지기는 어렵게 된다.
승진누락자에게 필요한 태도란쭈구리가 되지 말고 떳떳한 태도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회사가 인생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좋아하는 일을 찾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적기인지 모른다. 스스로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분명 전보다 더 멋지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