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다녀오고 단상
1.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첫째 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관람했다. 40분가량 되는 짧은 단편들이 세 개가 있는 영화였다. 세 단편 모두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되는 '우연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로 인해 인물 간의 관계와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하게 다룬 영화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벌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조명하는 방식이 참 좋았다.
2. (아쉽게도)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영화제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가 상영되었고, 영화가 끝나고 배우들의 GV 프로그램 또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GV 시간에서, 어떤 관객이 질문 시간에 권해효 배우분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식으로 울면서 화를 내며 행사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정말 우연하게도, <옥희의 영화>라는 홍상수의 영화 중에는 이것과 매우 유사한 시퀀스가 존재한다.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로 끌어당겨지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걸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울 뿐.
3.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0월 12일) 관람한, 이번 영화제의 내 마지막 영화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이었다. 매우 충격적이며 파격적인 이 영화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육체적인 고통과 아픔, 그리고 정신적인 갈등을 관객에게 전가시키는 데에 탁월했다. 보는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영화 내내 몸을 배배 꼬며 감상했고, 이는 옆 좌석에 앉으신 다른 관객 분도 똑같았다. 당시 내 좌석에는 팔걸이가 고장이 나서 떼어져 있었는데, 철로 된 그 절단면이 매우 날카로웠다. 몸을 비틀며 영화를 감상하다가, 팔에 무엇인가가 긁히는 느낌이 났다. 아마도 그 절단면에 베인 것 같았다. 인지하자마자 쓰라림이 몰려들어왔고, 약간의 피도 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 우연하게도,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고 주인공은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내 지금의 상처로 인해, 영화 속 고통이 더 생생하게 전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프기도 하고, 웃을 장면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뭔가 조치가 필요했기에 자원봉사자 분들께 이 사실을 전달했다. 나는 괜찮았는데 다들 정말 죄송해하시는 게 느껴졌다. 한 분께서 소독약을 가져와 상처를 소독해주셨다. 당연히 소독은 미친 듯이 아팠고 나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비명을(속으로) 질렀다. 눈물이 질끔 나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그분은 더욱 죄송해하셨다. '안 그래도 보기만 해도 아픈 영화인데, 영화 끝나고 이렇게 아파하고 있으니 웃기네요. 이것도 영화적인 체험 같아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말하고 잠깐 후회했지만, 다행히 맥락을 이해하시고 같이 웃어주셨다.
4. 주변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실 나는 언제나 영화 이야기할 사람을 찾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영화제에서 같이 다니는 사람들 보면 정말 부럽고 그랬다. 그런데 이번 영화제에서는 같은 숙소 쓰는 분부터 시작해서, 정말 많은 분들을 새로 만났고 사귀었다. 늦게까지 영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밤을 지새웠고, 평소에 가족한테도 하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이런 이야기도 하는 사람이었나 싶고 그렇다. 그냥 그 시간이, 그날 본 영화가, 그 장소가, 함께한 사람들이, 모든 게 좋았기 때문일 거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5.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란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포착해내는 예술이다' 같은 뉘앙스의 말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우연과 상상>이 바로 그런 영화였다). 누군가에게는 화나고 짜증 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당신 얼굴 앞에서>의 GV 이야기도 그렇고, 내가 오늘 <티탄>을 관람하면서 겪은 일은, 영화 속의 모멘텀들이 현실과 연결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연결은 영화제라는 시간, 공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역동성에 의한 것이며, 영화라는 매체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