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풍성해지면 디자이너의 역할도 확장된다.
디자인 전공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초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적합한 Design Tool을 익히는 것이다. 디자인 툴이라면, 생각한 것을 빠르게 시각화하는 스케치부터,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매우 실제적으로 형상화하고 표현하는 그래픽 툴까지 매우 다양한데, 디자이너는 이러한 툴들을 통해 각자가 가진 생각을 다듬고 타인과 소통하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실무 경험을 쌓는 동안 디자이너가 다루는 툴은 매우 다양해진다. 이는 상황에 맞는 툴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디자이너의 생각을 타인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는 손그림이나 2D 그래픽 툴이 가장 기본적인 언어이고, 공간 디자이너들에게는 도면과 3D 그래픽 툴이 그렇다. 영상을 디자인하거나 UX를 디자인할 때에도 그 분야에 적합한 서로 다른 툴이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뿐만이 아닌, 일반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확장된 언어 체계로서, 소통 도구로서 툴을 다루게 된다.
많은 경험을 가진 노련한 디자이너라고 해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의 종류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디자이너의 역할은 달라진다. 하지만 역할의 확장을 기대하는 디자이너들의 경우에서,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디자인 툴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컬러값이 어떻고 감도가 어떻고 사이즈나 비례 등의 언어에 익숙한 디자이너들에게 시장 세분화 전략이나 가격 포지셔닝, ROI나 BEP와 같은 개념 언어는 생소함 그 자체이다.
브랜드를 리뉴얼하거나 새로운 상품 출시를 준비할 때, 기업에서는 수많은 부서의 담당자들과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게 된다. 재무나 회계 담당자, 인사 담당자, 영업 담당자, 마케팅 담당자, 생산 조직이나 기술 담당자들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숙제 앞에 모여든다. 여기에서부터 디자이너는 언어의 장벽, 아니 그 너머에 있는 사고체계와의 장벽을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디자이너는 어떤 시안이 우리회사에 더 적합한가를 논의하고자 했지만, 느닷없이 상품 포트폴리오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얹어지기도 하고, 직원 내재화나 운영 프로세스 같은 모호한 개념이 덧입혀지기도 한다. 디자인이라는 감각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경영의 언어를 다루지 못하는 디자이너의 만남은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쉽게 이어지곤 한다.
(한 기업과의 프로젝트 미팅에서, 기업의 담당자는 자신들의 고민과 프로젝트 배경을 디자인 에이전시 참석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하지만 미팅이 끝나고 난 뒤 회의록을 작성하기로 한 디자이너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 중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새로 오신 상무님이 CRM 활동을 강조하셔서, 현재 저희 서비스의 VOC부터 진단하는 중이에요. 저희 회사의 BM과 Value Chain을 토대로 CDJ상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포트폴리오 전략부터 재검토하려고 해요. PB 상품으로 제안해주신 아이템들은 MOQ가 너무 크고 매장 SKU를 늘리기도 어려워서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디자이너도 디자인 언어를 넘어서 경영이나 마케팅, 인문학적인 Literacy가 필요하다. 그것은 디자인만을 위한 툴이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툴로서의 언어이다. 확장된 디자이너의 언어는 숫자, 텍스트가 될 수 있고 새로운 문법과 감각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보다 넓게 통용되고 해석될 수 있는 언어를 활용한다면 그만큼 디자이너의 역할도 확장된다. 디자이너의 제안이 서로 다른 언어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지점을 고민하고 상상하는 구심점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아트보드 위에 머물렀던 디자이너의 언어를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책상 위에 올려두기 위해 브랜드 경험 기획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는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을 팔지 않는다. 디자이너의 생각이 디자이너를 벗어나는 방법,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의 관점이 디자이너에게 전달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 프로세스와 노하우를 판다. 이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경험, 누구나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서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것이 브랜드나 디자인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첫번째 조건이라고 믿고 있다. 조금 더 확장된 언어권의 디자이너, 혹은 더 넓은 언어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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