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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욱 교수 Aug 29. 2022

니 약점은 OO밖에 없어

그녀는 사색이 되어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나이가 더 어린 상사가
있어도 괜찮겠어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질문이다.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대기업 경력이 필요했던 나는 K그룹에 지원했다.


K그룹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계열사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계열사들은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가지고 있고 이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그룹의

미래를 견인할 '미래의 먹거리'를 발굴하는 'K그룹 미래OO연구소'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네바다주의 51구역 공군기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보는 날,

자주 사용하지 않는 회의실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짙은 향기의 커피 향기로 채워지는 공간에

P연구소장과 그 아래 3명의 그룹장들이 면접에 들어왔다.

연구했던 분야 질문, 의학 질문, 기술 질문 등

찐 전공자인 내게 던지는 타 전공자들이 준비한 무거운 질문들은 너무 가볍기만 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우리 K그룹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 명제(statement)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다.


OO학을 전공했던 인재라서 미국까지 넘어가 어렵게 모셔왔다는

당시 40대 후반 미혼의 여자 P연구소장은 미국식 문화와 한국식 문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척'하는 자기 필요한 대로 문화 가져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눈치 100단의 토종 한국사람이었다.


나보다 2~3살 정도 아래 나이의 그룹장들은

K그룹에서 오랜 시간 굴려지고 단련되어 단단 매끈한 차돌 같은 R그룹장.

차돌 옆에 있어야 돌이라고 인정받음을 잘 알고 있는 K그룹장.

그리고, 늘 목에는 스카프, 움직일 때는 스포츠카와 함께, 근무시간에도 영자 소설책을

당차게 읽고 있던 여자 그룹장 C였다.


다 사람 사는 건데 저는 괜찮습니다.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C그룹장과 일하게 되었다.


K그룹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정 안 가는 캐릭터 C는 그룹사에서 만난 남자와 그룹의 전 직원들이 알만큼 뜨거운 열애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얼굴 이곳저곳에 전 날 밤 싸움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출근을 하는 날이 반복되더니 결국 이혼을 했다고 했다.


쌀쌀했던 어느 날, P소장과 C그룹장 그리고 나는 지방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P소장이 운전을 하고 C그룹장은 조수석에서 S등급-Super 등급, 통상 A, B, C 업무평가 그 이상의 등급-을 받아내기 위해 맞춤형 수다를 떨어주고 있었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갑자기 내 귀에 들이는 P소장의 소리

'그래~ 니 약점은 이혼한 것 밖에 없어~'


P소장이 미처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던진 말에

사색이 된 C그룹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빼꼼히 쳐다보았고

순간적으로 나는 자는 척을 했다.

지금도 왜 내가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눈을 뜨고 있으면 서로들 난처한 표정을 지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P소장과 C그룹장은 당황한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리고서는 목소리를 톤-다운시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마 C그룹장은 어리석게도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니 그릇은 그 정도뿐인 것을.)


goldenpig blog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도착할 때까지 자는 척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영악하고 눈치 빠른 그 둘은 내가 정말 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는 척을 해준다고 생각했을까.

내 배려를 알기나 했을까?


나는 학교로 옮기면서  그 회사를  떠났다.

몇 년 전 그 회사에 아직 남은 후배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P소장은 다른 계열사를 전전하다 끝내 '임원(임시직원)'의 수명을 다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같이 사표를 낸 C그룹장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환갑이 된 P소장과 그녀를 그렇게 따르는 척하며

그룹사에서 1명이 나올까 말까 한 S등급 평가를 몇 년 연속받아 엄청난 인센티브를

받아가면서도 동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던 C그룹장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S등급에게는 연봉의 30%가 인센티브로 제공이 되는 등 금전적 혜택이 많다.

등급은 총량제라서 누군가가 S등급을 받으면 다른 동료는 더 낮은 등급을 받아

그 차이를 메꿔야 한다.  



과연 그 둘은 지금도 그때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생의 파트너로 생각하며 지낼까.


거주용 고급 아파트,

업무시간 외 어떤 분야든 1:1 개인 레슨 지원,

한도 없는 법인카드,

최고급 승용차(필요시 기사 지원) 등

그룹에서 임원에게 제공되는 풍부한 혜택들을 단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며

어떻게든 그룹 최고경영자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참기름 짜듯이 쥐어짜 내던

환갑이 된 P소장, P소장에게 거머리처럼 착 붙어 S등급을 빨아내던 C그룹장,

그룹 세미나에서 리즈 시설 P소장의 긴 생머리 사진을 띄워놓고

입에서 침이 튀기도록 칭찬 해대며 꽃 나팔을 불어대던 R그룹장,

세상을 사는 각자만의 생존 방식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그리운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직급의 '담임'이라는 직급으로

지하실에서 묵묵히 일해주던 K담임.

회사로 걸려오는 수많은 전화를 대신 받아주고 필터링해주던 Y사원.

퇴사하던 내게 핑크색 넥타이를 선물로 주던 L대리.


결혼해서 퇴사하기도.

애들 키우면서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는 친구도.

건강이 좋지 않은 친구도.

승진해서 조직을 이끄는 친구도.

새로운 공부나 운동을 시작한 친구도.

예전과 다른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길었던 여름을 보내는 바람이 분다.

그대들과 함께 보냈던 계절이 다시 온다.

이제 그만 뜨거운 여름의 열정을 내려놓을 시간이네.


가을 바람부는 분당 중앙공원 근처에서

-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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