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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욱 교수 Dec 04. 2022

OK마트의 OO대결

갑작스러운 전공, 경력, 칭찬 릴레이

풉!!


웃겼다.

너무 웃겼다.

너무너무 웃겼다.


밤 9시가 넘어서야 기나긴 토요일 하루 라이딩이 끝났다.

집에 들어가기 전 저녁 간식으로 어묵과 소시지가 먹고 싶었다.

입구에서부터 달달한 과일과 상큼한 채소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동네의 작디작은 마트에 들렀다.


마트는 단 두 개의 POS 계산대만 있는 말 그대로 '작은 마트'다.

이 두 계산대 앞에는 모두 평소답지 않게 긴 줄이 생겨있었다.

무덤덤하게 기다려도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캐셔 아줌마들은 POS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고 관리직인 듯한 젊은 남자는

골치 아픈 듯 손바닥을 이마에 얹고 어딘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껐다 켜도 안돼요'

'오늘만 4번째예요'


대충 들어보니 오늘 POS(포스, 계산대 컴퓨터)가 몇 번 다운됐었는데

하필이면 마감 시간을 앞두고 또 다운이 됐는데 복구가 되지 않는 상황인 듯 보였다.


내 앞에 30대 중반쯤 보이는 젊은 남자 A가 말했다.


'껐다 켜도 안되면 허브 전원을 내렸다가 다시 켜보세요.'

'그래도 안되면 RJ45 커넥.......'

말을 꺼내더니 갑자기 고개를 살짝 숙이며 '훗~' 웃어대며 다시 말한다.

'랜선을 뺐다 다시 꼽아보세요'


아마도 자기가 사용한 'RJ45 커넥터'라는 용어를 캐셔 아줌마들이나

관리직 남자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이런 고급스러운 용어를 한낱 이런 작은 마트에서 쓰다니'


뭐 이런 생각이었을까?

A 남자의 '훗~'하는 가벼운 웃음기와 고개를 떨구며 살짝 젓는 머리 모양에

난 코가 막히고 기가 막혀서 눈만 꿈뻑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A 남자 앞에 서있던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B 남자가 A 남자에게 말했다.

B 남자: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A 남자가 B 남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A 남자: '제가 삼성 SDS 다녔어요'

B 남자: '...... 아이고~ 대단하신데요!'

A 남자: '아이고 뭘요 하하'


POS는 계속 먹통인데 자기네들끼리 갑자기 벌어지는 필요 없는 경력 자랑과
서로 간 진심 없고 뜬금없는 칭찬 릴레이가 너무 웃겼다.
좋소기업 코믹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다.


A 남자보다 POS 기기의 고장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손에는 '두부'와 '과자'를 들고서 계산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C 남자는 직접 계산대 안까지 들어가서 마우스로 POS 소프트웨어를 구동시키며 말했다.


C 남자: '와~ 좀 바꾸시지. XP를 아직까지 OS로 쓰시네~'

B 남자: '저분이 좀 아시나 봐요'

C 남자: '훗~ 저는 리눅스 전공이에요'

A 남자: '앗! 그러면 인정입니다!'


동네 마트 계산기의 노후화로 인한 시스템 다운일 뿐

고객들이 말로써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식료품을 들고 줄 서 있던 남자들이 지켜만 보면 많은 여자들 앞에서

멋지게 보이고 싶었는지 갑자기 전공 부심, 경력 부심을 '입'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C 남자는 자기가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서버를 만지면 해결할 수 있다고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하며 허세를 부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보기엔 A, B, C 남자들 모두가 너무 가소롭고 웃길 뿐이었다.


※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마트 밖에는 좀비가 있고

    마트 안의 고객들이 협동해서 해결 방법을 만들어내야 하는

    미국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면

    차라리 좀비 편이 되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째.

왜 'RJ45 커넥터'라는 단어를 자신과 같은 분류가 쓰는 고급 전문용어라고 생각할까?

왜 캐셔 아줌마들은 자신처럼 전산 전공자는 아니어서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까.

그 사람들 뒤에 서있던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있었던 '나'는 그런 것을 몰라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까? 자기들만이 마트 대기줄 그룹 안의 가장 전문가로 인정해버리는 오류는

대체 어디서 발생했을까?


인간적인 오류 이론에 대해 대학원 박사과정 HCI/HMI 랩에서 연구했었다.
사람은 많은 오류, 실수를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의 신념에 맞춰 들어온 정보만을
올바른 정보로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오늘 마트의 남자들은 '자신보다 더 IT전문가는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해한다. 30대 아닌가. 나도 그 나이에는 그들보다 더했다.


삼성 SDS에 다녔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어딜 다닐까?
물론 더 좋은 회사에 다니고 좋은 연봉과 좋은 대우를 받으실 것 같다.
그러면, 저녁 반찬은 가까운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의 명품 식품을 이용하시지
왜 싸구려 동네 마트를 이용하시는지 묻고 싶다. 서민 체험하시는 건가?


나를 포함해 남자는 5-6명이었다.

그중 적어도 4명이 IT 전산 일을 하시는 분 같았다.

우리 동네에 IT 전문가가 이렇게 많이 사시는 줄은 미처 몰랐다(90% 정도).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어디서나 차고 넘치는 게 IT 개발자, 유지보수자, 계약직 개발자들이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카디악 어레스트(심정지)가 온 환자를 살려야 되는 상황도 아닌데

이 분들이 캐셔 아줌마 앞에서 근거 없는 부려대는 직업 부심, 전공 부심이 솔직히 역겨웠고

캐셔분들께 죄송했고 지식은 배웠을지언정 인성으로는 배우지 못한 겸손치 못한 행동으로 보였다.


왜? 실명도 밝히고 최종 졸업 학교와 전공도 밝히고

현재 근무 직장에서 담당하는 업무와 업무범위도 설명하고
이번 인사평가 점수 등급이 A인지 B, C인지도 밝히면

고장 난 마트 POS 기기를 손댈 수 있는 '권한 승낙'을 얻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둘째.

백화점, 마트와 같은 유통회사들은 그 시스템을 유지 보수 관리해주는 계약된 전문업체가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해당 시스템에 손을 대지 못한다(궁금하면 전화해서 물어보고 와라.)

해당 시스템을 잘~아는 전문가 할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계약된 업체가 아니면 절대 손대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과자, 빵을 들고 줄 서서 기다리는 고객 중 한 명이

자신이 결제해야 되는 POS 시스템의 서버를 접근해서 손댄다고?

나중에 혹시 결제내역이 날아가거나, 계약된 업체에서 시스템 장애가 손을 댄 고객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매출이 모두 취소가 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형사, 민사로 가서 싸워야 하나? 다행히도 마트의 남자 관리자는 당당하게 여러 사람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서버실에 낯선 고객을 들여보내지 않았다(이런 신념을 가진 친구가 진국이다!)


POS 고장 문제는 주행 중 갑자기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사람을 꺼내는 인명구조와는 다른 문제다.

그분들이 작은 마트를 빠르게 도와주려고 하는 좋은 의지는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를 판단하는 시각에 문제가 있고, 결정 권한이 없어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영향력이 없는 고객일 뿐이다.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는 트러블 메이커가 될 확률이 높다.


셋째.


고객 입장에서 마트의 POS 기기 고장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뿐이다.


1) 시스템이 복구될 때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언정 기다린다.

2) 상품 구입을 포기하고 다른 매장을 이용한다.


이건 기본이고 상식적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말입니다.

줄 서서 이 상황이 빨리 종료된 후 상품을 구입해서 집으로 가고자

기다리고 있던 여성들 앞에서 갑자기 부리는

전문용어 허세
전공 부심 허세
뜬금없는 칭찬 릴레이
지구를 악당으로부터 구하는 듯한 영웅 허세


이런 상황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외국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관리자들이 와서 해결할 때까지 모두 기다리거나

상품 구입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뿐, 이번처럼 고객이 시스템 접근까지

요구하며 주변인들에게 허세를 부리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게 바로 '관종 특성' 인가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한국 남자들의 허세라서 이해해야 하나?

여자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영웅심리로 이해해야 하나?


이해하고 싶지 않다.

컴퓨터공학이나 엔지니어링을 배웠다면 시스템 트러블 슈팅의 첫 챕터에 나오는

'시간이 급할 경우에는 시스템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분들은 잊거나 모르는 경우다.


A, C 남자 같은 사람이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빠른 시간에 더 어울리는 곳으로

이직을 권유하고 싶다. 왜? 누적된 사소한 실수들이 쌓여 큰 사건이 되는 하인리히의 법칙.

큰 실수는 막아야 할 것 아닌가?


제발 좀 생각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네덜란드와 미국의 경기를 보고 나니

시간이 또 늦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유자주 향기에 발걸음이 냉장고로 향한다.

그 마트는 밤을 새워서라도 다 고치고 잘해놨겠지

안 그러냐?


-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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