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얼과 넋 -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역사서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여덟 자로, 저자 김부식 선생이 백제의 새 궐을 미학적으로 평하며 남긴 문장이다. ‘우리네 얼과 넋’을 주제로, 옛 어른들의 사상과 철학, 우리 역사에 서린 뜻과 정신, 우리네 맛과 멋을 오롯이 살피는 기고를 이어 나가려 한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15년(4 v.Chr.)조에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온조왕 십오년 봄 정월에 새로이 궁실을 지었으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관통하는 미학적 비평 여덟 자, 그 첫 서술이 이와 같다. 김부식이 평한 백제의 궁궐은 현대에 전하지 않지만, 백제의 미감을 여실히 내보이는 그 ‘검이불루’하고 ‘화이불치’한 유물로, 백제문화의 정수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있다.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공사 중 우연히 백제의 기왓장 조각이 발견되어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도중 절터 진흙 구덩이 속에서 출토되어 한반도를 넘어 세계 미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400여년의 세월을 넘어서 백제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그 아름다움을 여여히 발하고 있는 것이 이 백제금동대향로이다.
향로의 하부 받침에는 힘차게 용트림하며 오르는 용이 여의주 물듯 3단의 연판으로 장엄된 몸체를 받치고 있다. 연화화생(蓮華化生; 극락세계의 연꽃에서 만물이 신비로이 탄생함)하듯 풍만히 핀 연꽃봉오리의 고요함과 힘차게 치솟는 용의 몸짓으로 동動함과 정靜함을 오묘하게 조화시킨 하부에서는 靜中動(정중동)과 動中靜(동중정)의 미학이 엿보인다. 연꽃몸체 위로 맞물리는 향로 상부의 뚜껑에는 삼신산 능선이 겹겹이 또 부드러이 겹쳐진 모양에 여러 인물과 동물, 산길과 계곡 그리고 폭포와 호수까지 백여 가지의 도상을 묘사해 놓았다. 삼신산은 동녘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뜻하는 것이다. 향로 상부의 삼신산 가장 높은 봉우리 위로는 다섯 악사가 다섯 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악사들 사이 다섯 마리의 새가 꼭대기의 봉황을 우러러보듯 시선을 위로 향하고 있다. 향로의 꼭대기에는 살포시 앉아선 곧 날아 오를 듯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이 보주 위로 서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도가적 · 불가적 이상향을 조화롭게 표현한 향로는 백제문화가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또한 보여낸다. 11.8kg의 무게에 높이는 61.8cm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향로 중에서는 제일 큰 크기를 자랑하며, 형태면에서도 유례없는 세계에 유일무이한 향로이다. 처음 발굴됐을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 줬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들에게도 탐나는 걸작인 것이다. 하지만 이 대향로가 능산리 절터에서도 대장간 자리에서 발굴되었으며 전후로 발굴된 여타 백제의 문화재로 말미암아 백제의 특산품임이 분명하다. 중국 한나라 박산향로를 모티브로 하였으나 백제만의 미감으로 빚어낸 독창성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재현하기 어려운 첨단기술이 뒷받침된 뛰어난 과학성은 아름다움에 더하여 그 가치를 더욱 존귀하게 한다. 백제 예술의 백미인 저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숨은 듯 자리한 상부 12개의 배연구로 피어오르는 향을 상상해 보시라. 그 얼마나 장엄한가. 옛 어른들이 어떻게 문화를 향유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문화유산이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아름다움의 이상은 백제뿐 아니라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현대에까지 이르는, 우리나라의 미학을 관통하는 표현이다. 머지않은 시대의 작품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저 두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와 국보 제78호가 그 미감을 또한 오롯이 내보이고 있다. 왼쪽 무릎 위로 오른발을 걸치고서 뺨에 손을 살포시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의 반가사유상은 본래 싯다르타가 태자 시절에 인생의 덧없음과 인간의 생로병사를 사유하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 조각을 넘어 동양불교 조각의 기념비적 작품인 두 반가사유상은 인간이 창조한 절대자의 가장 완성된 형상이라 평가 받는다.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의 두 석탑으로 시작되어, 불국사의 두 석탑으로 그 미학적 완성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검이불루’한 석가탑과 ‘화이불치’한 다보탑은 각각 석가모니와 다보여래를 상징하여 서로 마주보고 진리를 논하는 <묘법연화경>의 한 장면을 석탑으로써 표현한 것인데, 통일신라 석조예술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을 다시금 이끌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이가 있으니,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이다. 태조삼년(1394), 조선은 수도를 새로이 한양으로 정하고 이듬해에 법궁인 경복궁과 종묘사직을 준공한다. 이에 삼봉 선생은 직접 그 이름을 짓고 의미를 남겼는데, <태조실록>과 <조선경국전>에 전한다. 태조에게 올린 《조선경국전》에서 선생은 “宮苑之制 侈則必至勞民傷財 陋則無以示尊嚴於朝廷也。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 궐의 제도는, 사치로우면 반드시 백성을 고달프게 하고 재정을 해치며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검소하고도 누추한 데에 이르지 아니하며 화려하고도 사치로운 데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 이에 이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 하여 궁궐이 지향해야 할 이상을 제시했다. 이렇듯, 나라를 세우고 궁궐을 지음에 조정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사상과 마음을 다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나. 세계 어느 나라에 궐이 사치로우면 백성이 힘들다는 마음으로 지은 곳이 있는가.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럽다. 또한, 저 광화문 너머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그 뒤로 교태전과 후원 아미산에 이어지는 북악과 북한산의 어울림은 창덕궁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건축이 얼마나 자연과 조화로이 자리 잡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 쇤부른과 불란서의 베르사유와는 사뭇 다름이 사실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하면서도 자연과 더부는 우리네 옛 건축은 현대건축에 귀감이 되어야 마땅하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세움에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청빈낙도(淸貧樂道)의 맛과 멋이 생활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고려의 화이불치한 미감과 달리 조선은 검이불루한 미감을 취한 것이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조선백자이며, 그 중 백미는 백자대호(白磁大壺), 일명 ‘달항아리’이다.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어 달항아리라 이름 붙여졌고, 어떠한 문양 장식 없이 또 완전히 둥글지 않은 너그러운 맛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조선백자의 미를 대표하는 항아리로 일찍이 兮谷 최순우 선생은 ‘잘생긴 며느리’라 하였고 樹話 김환기 등 여러 예술가들로부터 사랑받아 왔다. 이러한 백자와 더불어 잘 어우러지는 것이 조선의 목가구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서안과 사방탁자는 선비들이 쓰던 책상이며 생활가구인데, ‘검이불루’의 절제된 미감을 넘어 간결하고 시원한 비례로 모던한 감각을 선보이니 오늘날 우리의 집안에 들여도 손색이 없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장조비 현경왕후(혜경궁 홍씨, 정조의 모친) 옥책함과 궁중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주칠 소반에는 조선의 ‘화이불치’한 미감이 또한 잘 드러나 있다. 수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게, 궁중의 위엄을 잃지 않은 조선의 품격을 보여낸다.
이와 같이 유구한 우리네 역사 속에, 건축으로부터 금속공예 석조공예 도자공예 생활가구에까지 검이불루하고 화이불치한 미감을 적용치 아니한 것이 없다. 이러한 안목으로 우리 선조들은 살아왔다. 안목은 시대를 관통하여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방면에 적용되는 핵심요소이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무언가는 모두 어느 이들의 안목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안목이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안목을 넓히고 높이고 키워감에, 저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뜻을 되새겨 삶에 오롯이 적용시킨다면 우리네 삶은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儉검: 검소할 검, bescheiden/sparsam
而이: 말이을 이, und(aber)
不불: 아닐 부/불, nicht
陋루: 더러울 루/누, dürftig/hässlich
華화: 빛날 화, schön
而이: 말이을 이, und(aber)
不불: 아닐 부/불, nicht
侈치: 사치할 치, luxuriös/verschwenderi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