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아름다움 -
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君子修道立德 不爲困窮而改節
난은 깊은 숲에 나 살아감에
아무도 없다하여 향기를 아니 내뿜지 아니하고
군자는 도를 닦아 덕을 세움에
처지가 곤궁하다 하여 절개를 저버리지 아니한다
《공자가어》 중 공자께서 난을 군자에 비유하여, 선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신 말씀이다. 군자의 도는 난과 같다는 것이다. 올곧은 난초의 품성과 더불어 난화의 그윽한 향기를 실지로 맡아본 이라면 더욱 수긍이 갈 것이다. 사군자 梅·蘭·菊·竹,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은연히 피어나는 매화, 메마른 땅에서 오롯이 향을 발하는 난, 서리치는 가을에 홀로 강직히 피어나는 국화 그리고 사시사철 꼿꼿이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중 앞서 살핀 梅에 이어 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난은 깊은 산중에서 비와 이슬만으로 살아가면서도 수려한 잎에 고결한 꽃을 피워 고고한 향기를 멀리까지 발한다. 또한 지나친 것을 꺼리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중용의 도를 지키는 군자의 품성을 보이니 뭇 선비들이 그를 아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한 난을 그리는 것을 일컬어 ‘난을 친다’했고, 단순한 사생(寫生)이 아닌 수양의 일부로 여겨왔다. 매화의 주제에서 살핀 작품 <월매>와 함께 《삼청첩三淸帖》에 전하는 <난죽蘭竹>도는 혜란(蕙蘭) 한 떨기가 바람을 맞으며 여여히 향을 내뿜는 모습을 그린 절품인데, 난의 그 아름다움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灘隱 이정(1554~1626)은 바람을 맞아 흩날리는 난을 중심에 두고 대나무를 곁들여, 더불어 군자의 덕을 발하는 자태를 굳세고 강직한 필치로 묘사했다. <월매>에서와 같이 금니(金泥)로 그려져, 그 광휘로움으로 왕가의 종실(宗室) 신분임을 드러내듯 우아하면서도, 바람에 굴하지 않고 강건히 피어내는 난의 그 절개를 오롯이 그려내었다.
1594년 12월 12일에 그려졌다고 전하는 20폭의 그림과 당대에 함께했던 문인과 후대의 발문 등 총 54면으로 구성된 이 한 첩의 물품은 당대부터 일세지보(一世之寶)라 칭해졌으며,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흐름과 그 격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존된 이 첩은 여러 이들을 거쳐 소장되어 오면서, 일부가 불에 타기도 했고 일제의 열도에 넘어갈 뻔한 고초를 격기도 했다. 와중에 간송 전형필 선생에 의하여 지켜져 사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후손의 안광(眼光) 또한 형형하게 하니, 당시 최립(崔岦)이 삼청첩에 제하며 남긴 칠언 율시의 감회는 지금 우리에게도 다름이 없다.
三年此會干戈後 병란 후 삼 년 만에 이러이 만나노니
一卷仍將琬琰留 옥과 같은 그림 한 첩 남겨 두셨구먼
造物全君幾折臂 끊어질 그대 팔뚝 조물주가 지켜낸 덕에
餘生及我未昏眸 남은 일생 내 눈이 흐려지지 않게 되었소
淸香豈取供花事 맑은 향기 어찌 그림 속 꽃에서 취하련만
苦節應憐與雪謀 굳센 절조 응당 눈과 더불어 드러나구려
久識傳神推妙絶 익히 알던 정신 담는 기량 더욱 현묘해져
詩篇字法又風流 시와 서를 더하니 풍류가 넘쳐흐르오
우리나라에서 난화가 여러 화가와 여러 화풍으로 그려지고 발전한 것은 18세기부터이다. 그 필두에 豹菴 강세황(1713~1791)이 있었다. 강세황은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나 당대에도 삼절로서 이름을 떨친 예원의 총수로,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사군자를 논함에 있어 표암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매란국죽을 함께 그린 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난이 뛰어나 ‘강표암이 난을 친 이후로야 비로소 우리 땅에 난화가 있기 시작했다.’라 하는 평이 있을 정도로 그 필력을 자랑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군자도>에서 대나무와 난, 매, 국화를 한 벌에 함께 그려 사군자의 그 의미를 더했고, 그 중 난화의 수려함은 스스로도 자부했다는 실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우리나라의 난화를 논함에 있어 필히 뫼셔야 할 두 어른이 계시니, 秋史 김정희(1786~1856)와 石坡 이하응(1820~1892)이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붓글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고증학과 금석학의 석학이자 불가사상에 또한 도통했고, 북학파의 맥을 이은 당대의 대학자이자 시대의 감식안 이었다. 추사의 회화작품 중에 난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아들 상우(金商佑, 1817~1884)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생은, “난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필히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갖춘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라 역설했듯 난화의 역점을 파악하고 강조했다. 선생이 삼십여 년 동안의 난화 연구를 통하여 하나의 첩을 남겼으니,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난맹첩蘭盟帖》이 그것이다. 그 중 《난맹첩》의 첫 폭에 전하는 이 <적설만산>도는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나는 자생란을 그린 것으로, 춘란(春蘭)의 강직한 기상을 그리고 더불어 제한 시로써 그 의의를 더했다.
積雪滿山 쌓인 눈은 온산을 뒤덮었고
江氷闌干 강은 얼어 난간을 이루노나
指下春風 손가락 끝 봄바람 일으므로
乃見天心 이내 하늘의 뜻을 내보이네
눈이 뒤덮이고 강은 얼어붙은, 추위가 채 가지 않은 겨울에 막 생동하는 난과 함께 손끝에서 느껴지는 봄바람으로 우주의 흐름을 읽은 것이다. 선생은 그러한 난을 치는 근본 바탕을 다음과 같이 논하며 난의 덕목을 본받아 스스로를 수양할 것을 말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마땅히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삐치는 잎 하나와 꽃 속의 점 하나도 마음을 살펴 거리낌이 없어야만 남에게 보일 수 있다. 수많은 눈이 보는 바이고, 수많은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만큼 엄정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작은 기예(技藝)이지만, 반드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만 비로소 그 근본에 이를 수 있다.”
흥선대원군으로 더 유명한 석파 이하응은 김정희의 문하에서 붓글과 난을 배웠고, 특히 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스승인 김정희가 평하기를, ‘압록강 동쪽에 석파의 난에 비할 것이 없다. 나에게 난화를 구하지 말고 석파에게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입고출신(入古出新)하고 청출어람한 석파의 난을 한껏 찬탄한 했다. 이러한 석파란은 당대에도 위작이 있었을 만큼 인기가 높았고, 오늘날에도 다수 전해진다. 그 중 난의 그윽한 뜻과 함께 그려낸 다음의 작품이 있다.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서 동인괘를 설하는 공자의 말씀 중,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으로 무쇠를 끊을 수 있고, 같은 마음으로 말미암은 말은 그 향이 난과 같다.’하는 데서 취한 것이다. 마음을 함께하면 못할 것이 없고, 함께하는 그 미덕이 난화와 같다는 뜻으로 그린 것이다.
동시대에 난화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芸楣 민영익(1860~1914)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당대의 개화를 이끌었던 정치가이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또한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고, 무엇보다 뿌리를 드러낸 난화로써 조국의 처지를 표현했다. 유린당한 땅에는 뿌리내릴 곳 없다는 심정을 난으로 드러낸 것이다. 삼성미술관 Leeum에 소장된 <노근묵란>도에서는 비록 뿌리는 땅 밖에 드러나 있으나 난은 더욱 굳세게 향을 발하듯 강직하게 묘사하여, 흡사 독립에 투쟁하던 그 시절의 어른들을 뵙는 것 같다. 노근(露根)의 난은 본래 송말원초의 정사초(1241~1318)가 처음 그린 것인데, 나라 잃은 한을 뿌리를 드러내 그린 것이다. 덧붙이자면 난화는 조맹견과 정사초의 시대에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아울러, 필자가 실로 완상하며 그 필치에 깊이 감명하였음에, 이 기고를 통하여 독자여러분께 꼭 소개하고픈 난화 가 있으니, 독립운동가 友堂 이회영(1867~1932) 선생의 난이다. 선생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났음에도 부귀영화를 포기하며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었고, 또 그 형제들과 더불어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에 힘써 나아간 어른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초창기의 임시정부 조직에도 주축이 되는 등 끝없이 독립에 힘써 오셨으나 끝끝내 광복을 맞지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서거하셨다. 선생이 친 난을 바라보면, 마치 선생의 독립에 대한 기개가 드러나는 듯하다. 또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사군자를 오직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만 내놓았다 하니, 그와 같은 어른들 덕에 이 땅에 서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울리는 바가 자못 크다.
退溪 이황 선생께서 군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난초에 비유하야 논한 말씀이 있다. 이를 끝으로 난의 그 고고한 향을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己者, 卽張敬夫所謂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有一蘭草, 終日薰香而不自知其爲香, 正合君子爲己之義.; 군자의 학문이란 스스로를 위할 따름이다. 이른바 스스로를 위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위하는 바 없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속에 한 떨기의 난초가 있음에, 종일토록 향기를 발하면서도 스스로 향을 발한다는 것을 알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군자가 스스로를 위하는 학문과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