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신과 의사의 여행과 삶 이야기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책 <걷다 보니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이다. 평소 관심이 많은 여행, 걷기 두 가지 키워드에 눈길이 갔다. '보고 재미없으면 말지 뭐'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빌렸는데 함께 빌린 책 3개 중에 가장 먼저 완독 했고 후기를 남기고 싶을 만큼 인상 깊었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여행기 중에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정신과 의사라는 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은연중에 의사는 특별할 것 같다는 인식과 이런 주제의 책을 쓴 사람이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의사는 아니겠지라는 기대감이 공존했던 것 같다. 결론은 의사라는 타이틀 빼고는 나랑 같은 고민을 하고 느끼며 똑같이 현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특히 책에서 내가 크게 공감되었던 건 여행은 멀리 가서 고생하는 것, 그래서 유럽 여행만 고집했던 것. 동행자에게 내가 즐거운 걸 그들도 즐거워해주길 바랐던 것. 그걸 즐기지 못하면 억울하고 잘못됐다 생각했던 것. 혼자 여행을 호기롭게 떠났지만 정작 엄청난 고독함을 경험한 것. 팬데믹 후 등산에 빠지고 주변을 관심 있게 돌아보게 된 것 등 내가 살면서 느낀 점 하나하나가 문장으로 쓰여 있는 것 같아 신기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기가 힘들어 고민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 여행에세이에서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도움을 받게 되었다. 저자는 버킷리스트 여행지였던 아일랜드에서 엄청 고독한 시간을 보냈었다고 한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없었고 언어의 장벽도 컸다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결국엔 그 혼자만의 시간이 내 생각과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보통 혼자서는 절대로 잘 못 지내면서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이 적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지는 않게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혼자일 때도 편안하고 때로는 즐거울 수 있는 요령을 익혀야 한다며. 나도 생각해 보면 매사 타인에게 즐거움을 구걸하며 함께 소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내 시간을 내 주관대로 소비하는 게 당연한 권리이고 즐거움인데 말이다. 혼자인 게 두려워 더 행복하지 않은 함께를 계속 유지해 왔다는 걸 알게 됐다.
내 마지막 해외여행은 2018년 대만이다. 이후 남미여행을 갈겸 퇴사를 했는데 몇 달 후 코로나19가 터졌다. 어쩔 수 없이 국내 곳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어떻게 해도 해소되지 않는 해외여행에 대한 미련. 그러다 이번 휴가 땐 해외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같이 갈 일행이 있었지만 같이 가게 되면 계획 짜고 신경 쓰느라 지칠 것 같고 그렇다면 날 위한 휴가가 아닌 것 같아 결국 혼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근데 몇 년 만에 가려니 기분 좋은 설렘과 긴장감보다는 두려움과 귀찮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훨씬 어린 나이에 혼자 유럽도 다녀왔는데 고작 일본 한번 나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그러다 대안으로 울릉도+독도 여행을 가볼까도 생각했다.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고 혼자 가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딱이다 싶었다. 교통과 숙소를 예약해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날 오후에 이 책을 다 읽고, 음 해외로 나가볼까? 싶어졌다.
조금의 용기는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환경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똑같은 생각만 맴돌던 내 머리도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이 와닿았다. 내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게 스페인 여행인데 낯선 곳에서 전혀 다른 배경과 성격의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돈도 없고 두려워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의 작은 용기는 훨씬 큰 가치와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슬픈 편안함이 아닌, 숨찬 행복감을 위하여!
사람들이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너무 좋고 편하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누군가는 합리화하는 거라고 했지만 난 진심이었다. 심하게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고 바쁘지도 않고 하고 싶은 걸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건 다르게 해석하면 아무 자극이 없다는 말인 것 같다. 원래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일상 자체가 지상 낙원이겠지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역마살이 꼈다고 할 만큼 늘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었고 목표하던 그곳을 꼭 갔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 전체를 두고 나만의 도장 깨기를 해나가는 성취감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여행 과정에서 얻게 되는 삶의 원동력과 오랜 여운. 글로는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가치들이 있다. 이런 가치를 잊고 살면서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스스로 속인 게 아닐까 싶다. 이러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이슈가 발생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일상에 소소하게 라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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