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떠나고, 배불뚝이 아재가 남았네. 사라져 버린 10년
J 아빠, 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말 밝은 친구라, 우리 모임에서도 항상 중간자적인 역할도 많이 하고 분위기 메이커였지. 이제 너도 나도 10년여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배 나온 그저 그런 아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미움받지 않을 용기는 없다. 맞아. 나도 미움받지 않을 용기가 없어서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몸 상해 가며 일을 늦게까지, 주말까지 하고, 그러다 보니 가정도 힘들어지고 내 건강도 상하고, B의 상태는 더더욱 악화만 되어갔었지. ‘어쩔 수 없어. 다들 그렇게 살아,’ 그 말이 머리로는 이해되면서도, 가슴으로는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던 지…
네가 얼마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지 내가 너의 성품을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기에 충분히 잘하고 있을 거라 믿어. 장모님께서도 감사하게도 너와 제수씨를 배려 많이 해주시고 이해해 주시는 어른이라 내가 더 감사하다. 가족끼리 미움 주고 미움받을 일이 있겠니. 너도 조금 힘들 때는 장모님께 너무 어려워 말고 도움도 더욱 청하고 부부 두 사람의 시간을 보내도록 해. 네가 행복해야, 제수씨도 행복하고, J도 행복하고, 결국 장모님도 행복하실 거야.
맞아. 네가 키덜트 기질이 좀 있었던 것 같아. 우리 학창 시절에 너네 집에 가면 프라모델 같은 것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J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동의 취미거리를 찾게 된 것을 축하한다 친구야! 사실 나는 B가 딸이라서 내가 딸의 감성을 맞춰주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도 요즘 B와 새로운 공동의 취미를 찾았어!
요즘 B는 그림을 그리고 자르고 하는 놀이에 흠뻑 빠져 있단다. 그래서 요즘은 아무 전단지나 신문, 그리고 A4 용지에 그림을 막 그려서 그걸 오려서 동화책 아닌 동화책을 우리끼리 만들어서 아무 이야기 대잔치 형태로 동화를 만들어 보고 있어. 그냥 집에 남아도는 전단지나 신문, 그리고 종이와 펜, 가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정말 쉽게 할 수 있단다. 나는 이런 걸 내가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하나 보니까 그림도 그리고 자르고 하면서 은근 집중이 되어서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라고. 아마 이제 J도 곧 그림 그리고 가위로 자르고 하는 걸 좋아하는 시기가 될 거야. 그때는 집에 있는 신문이나 전단지 등을 잘라서 동화책처럼 한 장씩, 두장씩 같이 만들어 봐~ J가 정말 좋아할 거야!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나서 많은 기대와 욕심이 있었단다. 이런 것도 해 보고 저런 것도 해 봐야지. 그중에서 가장 큰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좀 많이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직장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이제 시간이 많아졌으니 말이야.
육아휴직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갈 때쯤 깨달은 게 하나 있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떻게 휴식을 가져야 할지, 쉴 때 어떻게 쉬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런 시간을 그동안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 아내가 나한테 그러더라. ‘자기는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라고 말이야. 시간이 좀 많아지면 정말 잘 쉬고 잘 놀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행복한지, 나의 취미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더라. 그래서 지난 두 달 여간 정말 육아하고 집안일하고, 멍 때리고 그러다가 시간이 간 것만 같아.
사실 정말 슬펐어.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그리고 가정에 대해서도 충실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시간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행복한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막막하고 답답한 감정을 한동안 갖고 있었단다. 다행히도 지금은 이 기회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자 라고 마음먹고 열심히 찾아보는 중이야.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도 좀 사라졌고 말이야. 너도 언젠가 육아휴직을 쓰고 너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 나와 같은 답답함과 막막함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나의 경험을 너에게 미리 귀띔해 준다. 육아와 일로 지치겠지만, 시간이 조금 있을 때마다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찾아 보길 바래.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야.
사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B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이 힘들어도 퇴근하고 너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서 스트레스도 풀고 해서 크게 힘들지 않았어. 하지만 스웨덴에서 주재원 생활을 5년 동안 하며, 타지에서 B를 낳고, 아내와 셋이서 잠을 못하는 예민한 B와 생활하며, 일도 일이지만, 육아로 인해 정말 힘이 들었단다. 애석하게도 스웨덴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뒤늦게라도 우리가 속에 참고만 지내왔던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풀기 위해 육아휴직을 1년 전부터 고민하고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단다.
때로는 당장 내가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도 방법을 찾지 못할 때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조금 늦기는 했지만 육아휴직 기간을 통해서 B에게도 좀 안정감을 주고, 부부 두 사람도 조금 마음의 안정을 찾는 휴식기를 갖기로 한 거야. 육아휴직이 약 두 달 여가 지난 지금에서 보니 결과적으로는 정말 좋았던 것 같아. 우리 두 사람도 마음의 여유와 건강도 좋아졌고, B 역시 지난번에 말해준 것처럼 지긋지긋한 잠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가족들이 모두 잠도 잘 먹고 신나게 웃고 즐기고 지내고 있어.
네가 기억하는 것처럼 초중고 시절 농구를 내 인생에서 나름 뺄 수가 없지. 집에 농구골대가 있을 정도로 농구 마니아였으니까. 초등학교 까지만 해도 항상 우리 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매일 농구를 했으니까. 하지만 대학을 가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그렇게 좋아했던 농구를 할 기회도 열정도 사라지게 되더라. 얼마 전에 혼자서 농구공을 들고 동네에 농구 코트에 가서 공을 몇 번 튀겨 보았어. 내 마음은 예전처럼 불꽃 드리블을 하고 정확한 슛을 날리고, 하늘 높이 점프를 해야 하는데, 현실은 몸과 공이 따로 놀고, 배불뚝이 아재가 가진 중력이 더 강하더라. 아마 B의 점프 높이 수준이나 비슷한 것 같아 하하.
친구야. 소년의 우리가 이제 청년을 지나 배불뚝이 아재가 되었구나. 지난 직장 생활 10여 년이 사라져 버린 시간이라고도 생각이 든다. 하지만 너와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되고, 나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찾아보기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 10년을 통해 더 나은 나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예전에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것 같은데 유느님 (유재석 님)이 이런 말을 동생들에게 해 줬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 가질 수 없기에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는 포기해야 한다’. 나이가 들며 우리도 신체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분명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J와 B가 있으니, 힘을 내자꾸나.
지난번에 네가 J의 등원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욕을 입히고, 먹히고 하는지 이야기를 해 줬던 것 같아. 아침 아이의 등원을 준비하며 아이를 잘 꼬셔서? 구슬려서 잘 등원할 수 있는 너의 노하우를 나에게 좀 전수해 주라! 등원에 쏟는 에너지만 아껴도 하루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