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좀 치워주세요

고시원 샤워실에 남겨진 '익명의' 팬티 한 장

by 산호초

고시원에 살다 보면 나와 남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옆 방 중국인 유학생의 통화는 내 본가(本家)에서 걸려온 전화만큼이나 친근하다.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그 대화를 백색 소음으로 대한다. 좁은 고시원 방. 창밖으로 차가 지나가고 위층에선 물소리가 들린다. 이 방에선 소리 하나하나가 중요한 주제다. 내 방에 인접한 공용 샤워실에서 누군가 샤워하는 소리, 파이프로 물이 흐르는 소리. 맑은 것이 공간 안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 파동이 가두어진 공간이 상상된다. 모름지기 소리란 귀로만 들었을 땐 청각이지만 마음으로 느꼈을 땐 공간감이다. 어떤 소음이든 귀 기울이면, 이 방의 바깥에도 누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프라이버시가 없는 데서 어떻게 살아?

고시원에 산다고 밝히면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살다 보면 생각보다 방음이 안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안 된다. 나는 ‘얼굴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내 비밀들을 다 불어버린다. 어쨌거나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과 통화는 하고 살아야 하니까. 대신, 복도에서 몇 호에 사는지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면 그 사람이 어느 방에 들어가는지 보지 않는다. 이곳에는 프라이버시가 없지만, 프라이버시의 ‘익명성’은 존재한다. 마음껏 들을 것, 마음껏 볼 것.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채로 남을 것. 복도에선 고개를 숙이고,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남의 살림을 염탐하지 않고, 사람이 지나갈 때 훅- 끼치는 체취 앞에서 숨을 참아줄 것. 그것이야말로 이곳의 선이고, 아름다움이고, 옳음이니까.




이런 종류의 도덕은 언제나 딜레마를 낳는다. 가령, 공용 샤워실 선반에 방치된 팬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것 말이다. 분명 새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 ‘누군가’의 것이므로 프라이버시다. 며칠째 사라지지 않기에 가져다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모르는 사람의 손에 ‘자기’ 팬티가 버려졌다는 것을 알면 팬티 주인은 분명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소각장에서 불타든, 매립장에 묻어지든, 어쨌거나 누구의 시선도 닿지 못하게 되기까지 그 팬티는 많은 이의 시선을 거쳐야 한다. 내 흔적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찜찜함은 오래가고, 갓 빤 이불에 남은 생리 자국처럼 성가시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팬티를 버린 것이지만, 그 사람으로선 ‘내’ 팬티를 누군가가 버리는 일이다. 그걸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나와 너, 배려와 무시, 비밀과 공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곳에서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선한 행동을 하지 못하겠으면 악한 행동이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양심이다. 몇호인가에 주인이 있을 것이므로 무작정 내다 버릴 수 없는, 악의 없는 권력으로 무장한 채 일주일 여를 전시된 그 팬티. 나는 항상 알록달록한 무늬가 그려진 면 팬티를 벗어나 무채색의 레이스 팬티로 넘어가기에 적당한 나이는 언제일지 궁금해했다. 기저귀 때부터 시작해 내 팬티를 줄곧 골라온 엄마로부터 ‘팬티에 대한 선택권’을 되찾아오는 때일까. 그게 아니라면 더는 유치한 팬티를 입을 수는 없다는 결심이 드는 때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결심은 도대체 몇 살에 드는 것일까….


내 팬티를 벗어 그 옆에 살포시 올려두니, 누군지 모를 그이나 나나 무난하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검은색, 당신은 베이지색. 우리는 아마 같은 대학을 다닐 테고, 당신도 고향이 멀 테고, 비슷한 시기에 캐릭터 팬티에서 어른의 팬티로 옮겨왔을 테고. 말하자면 우리는 그 팬티의 내력만큼이나 비슷하니까, 옆방에서 당신 또한 온 힘을 다해 나를 무시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그러니까, 팬티 좀 치워 달라고, 아니면 갖다 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써 붙이지 않은 것은 당신에 대한 내 애틋함이다.


오늘 아침에는 그 팬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마침내 갖다 버린 모양인지, 주인이 이제야 찾아간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름이나 호실 번호 같은 구체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샴푸 향기나 알람이 울리는 시간대, 자주 신는 신발같이 누군가의 취향이긴 하나 사실 누구의 것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특징으로 기억된다. 그 익명성 뒤에서 나는 점점 용감해졌고, 비밀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종종 벽과 벽 사이를 넘어갔다. 하지만, 중국에서 온 옆방의 당신도 그렇게 하니까. 우리는 아마 같은 대학을 다닐 테고, 당신도 고향이 머니,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는 그 ‘통화’의 내력만큼이나 비슷하니까.




아니, 이제 와 말하지만 민폐가 되는 쪽은 나보다는 당신이었다. 당신 상당히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내가 참았던 건 모종의 동질감 같은 것 때문이었는데. 우리 둘 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있고, 그래서 외로우니까. 당신도 내 통화 소리를 바깥의 길고양이 울음처럼, 윗집의 발소리처럼 받아들였을 거란 신념이 내게는 있었는데. 하지만 어느 낮, 당신은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어눌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네 사장님. 제가 그날 출근을 못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 중국어 아닌 한국어로도 한참이나 대화를 했지. 당신, 그럴 거면 복도에서 내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한국어를 말할 줄 안다고 귀띔해 줬어야지. 우리가 서로에게 함께 낯설었다고 기억하는 수많은 밤들, 그간 나는 일방적인 도청을 당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한참 낯 뜨거웠는데….


팬티를 찾아간 당신의 기분은 그렇지 않았기를 바란다.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현위치◀)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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