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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Aug 13. 2020

승인의 주체를 보라 :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 더글러스 서크.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들은 오늘날 멜로드라마의 정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은 분명 멜로드라마의 공통적인 양식(mode) 이외에도 더글러스 서크만의 작가적인 특질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리뷰에서는 멜로드라마의 양식으로서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과잉’으로 규정짓고, 그 과잉을 구현하고 조율하는 서크만의 패턴을 ‘삼원색’과 ‘클래식 음악’으로 파악하고 분석할 것이다. 또한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 금기시된 욕망을 봉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는 곧 대부분의 멜로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사회 통합적이며, 결말에 가서는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주인공 커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는 분석과 공명한다. 이 리뷰에서는 그 봉합이 남성중심주의적인 진단과 승인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색의 과잉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클래식 선율과 함께 늦가을 뉴잉글랜드 타운의 전경이 떠오른다. 여유롭고 보수적인 중산층 동네인 이곳은 한창 물든 단풍으로 울긋불긋 빨갛고 노랗다. 그 가운데 하늘색 차를 타고 주인공 캐리의 친구 사라가 등장한다. 새빨간 머리에 새파란 옷을 입었다. 캐리 또한 파란 차를 타고 다니며, 입술은 늘 빨간색 립스틱으로 빈틈없이 칠해져 있다. 서크의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삼원색으로 가득 차 있다. 빨강과 파랑의 강렬한 대비에 노랑이 더해진다. 삼원색의 사용이 가장 두드러지는 씬은 캐리의 딸 케이가 감정에 호소하며 엄마의 무릎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의 빨강, 노랑, 파랑이 인물들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색을 입힌다. 얼룩덜룩 물든 얼굴들은 이들이 일상성의 영역과는 다른 어떤 과잉의 차원에 들어와 있음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케이의 눈물 앞에서 론과 이별할 결심을 굳히는 캐리의 뒤에는 자코메티 풍으로 왜곡된 조각상들이 서 있다. 정작 이 장면에서 캐리는 어떤 감정표현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데, 음악이 그녀를 대신해서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분하다 못해 참담하게 보이는 캐리의 표정 뒤로 하강의 감정을 대변하듯 급박하게 내리 꽂히는 현악기의 선율이 들려온다. 음악은 후에 캐리가 자신의 사랑보다 자식들을 존중한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는 장면에서도 캐리를 대신해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한다. 잔잔한 슬픔과 후회의 정서를 담은 피아노 스코어는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흐르다가 텔레비전 스크린에 캐리의 모습이 비칠 때야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음악의 사용 덕분에 캐리의 감정은 뉴잉글랜드의 일원으로서 가지는 품위를 잃거나 주인공으로서 가져야 할 객관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



한편으로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중년 여성의 사랑과 욕망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한다. 캐리와 론 커플은 그들의 사랑을 철저하게 가십으로 파악하는 중산층의 속물근성에 부딪혀 난관을 겪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캐리가 론의 성적 매력에 눈이 멀어 있고 론은 돈을 노리고 부유한 과부와 사귀고 있다고 수군거린다. 캐리의 자식들조차도 론의 그을린 피부와 근육질의 신체에 욕망을 느끼는 것 아니냐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그와 같은 추문과 비난에 대해 캐리는 당혹감을 표현하는 한편 가타부타 말이 없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적어도 중년 여성이 젊은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캐리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억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론과 맺어지는 과정 자체는 철저하게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있다.





이별 뒤 캐리는 두통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는 분명 감정의 억압에서 비롯된 신경증 증상이다. 신경증 문제에 대해서는 캐리를 진단하는 남자 의사 또한 같은 의견이다. 바로 이 의사의 부추김 혹은 승인이 캐리로 하여금 론에게 달려갈 엄두를 나게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캐리는 전문직 남성으로서 보통의 마을 사람들보다 한 층 높은 차원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그에게는 ‘진단’하고 ‘처방’할 자격이 있다.)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움직인다. 그전에 론이 친구 믹과 함께 사냥을 하면서 주고받던 대화는 또 어떠한가. 론은 믹에게 청혼까지 하자고 한 자신이 캐리한테 사과해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은 없다고 우기고, 기혼자인 믹은 무조건적인 사과만이 해결책이라고 타이른다. 이는 캐리가 후에 믹의 아내인 알리다에게 자신은 겁쟁이였다고, 론과 자신 사이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개입시켰다고 자책하는 자기 성찰적 발언과 상충한다. 캐리는 결말부에 와서야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살던 자신의 영역과, 문명과 교류를 끊고 <월든>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론의 영역은 합치되거나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말은 결국 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누군가는 기존의 영역을 포기하고 상대의 낯선 영역에 전 신체를 의탁하는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그 역할을 캐리에게 맡기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인정이 사랑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는 말은 멜로드라마 서사의 논리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명제에 1950년대 미국 사회와, 보수적인 마을의 분위기와, 17살 때부터 가정의 울타리에서 안주인 노릇을 해 온 당시의 여성을 대입해보자. 캐리의 사고는 캐리의 잘못이 아니다. 캐리는 그렇게 사고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데, 캐리를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론의 입장은 지나치게 초월적이고 견고하며 이성적인 남성 화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론은 남성이기에 <월든>처럼 살 수 있고 후에 아내를 동반자로 끌어들일 수도 있지만, 캐리는 그렇게 살 것을 허락받지도, 그와 같은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 안에 놓여 보지도 못했다. 캐리에게 억압의 기제를 형성한 지배적인 가치 질서의 일부로서 마을 의사가 가지는 권위가 없었다면, 캐리는 끝내 론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말부도 문제가 된다. 그렇게 건강하고 강건하던 론이 파자마 차림으로 아기처럼 무력하게, 소파 위에 꼼짝없이 누워 있다. 캐리를 둘러싼 추문의 원인은 그녀가 가정 내에서 돌봄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할 중년 여성이면서도 성적 욕망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결국 그 욕망의 대상이었던 론을 캐리가 돌봐야 할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캐리로 하여금 끝까지 사회가 용인한 역할만을 수행하게 만든다. 론의 신체가 기능을 잃은 한 캐리와 론의 관계는 순수한 사랑의 서사 안으로 봉합될 수 있다. 창문 밖에 서 있는 사슴은 또 어떠한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피조물이다. 사슴은 의사라는 문명의 승인과 더불어 자연의 영역에서도 캐리와 론의 사랑이 인정받고 축복받았음을 나타낸다. 그 사슴조차도 멋들어진 뿔을 가진 (온 방을 가구와 꽃과 소품으로 빈틈없이 장식하는 서크의 심미안 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수컷이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캐리나 캐리의 사랑 자체를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인 캐리가 기존의 남성중심주의적 영역을 벗어나 다른 남성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을 초월적인 남성 대타자의 입을 빌어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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