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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Aug 13. 2020

발화 행위 / 텍스트와 컨텍스트 / 아버지의 영역

<빌리 엘리어트>(2000), 스티븐 달드리.



두 개의 씬을 중심으로 분석한 짧은 리뷰가 될 것이다.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 발화 행위 : 음성언어가 아닌 몸짓 언어를 통한

2. 텍스트와 컨텍스트 : 컨텍스트를 전제하지 않은 텍스트의 독해 불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번역이 시도되어야 할 필요성

3. 아버지의 영역 : 자신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징계의 관문







빌리 엘리어트는 성탄절 밤 체육관에서 조우한 아버지 앞에서 춤을 선보임으로써 발레 또한 '남자다울' 수 있다는 그 자신의 주장을 음성 언어가 아닌 몸짓 언어로 증명해내는 데 성공한다. '진짜 남자'만이 아버지에 맞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법이다. 남성 영웅 신화의 신봉자들이여, 아니 그러한가?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도록 빌리가 "언제나 너 자신에게 충실할 것"을 요청하던 엄마의 부탁을 수행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춤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부인하지 않는 것. 자신의 이끌림을 차단하는 장벽 앞에 온몸으로 부딪히기. 자신이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춤으로 정의되는 일련의 몸동작)을 통한 설득과 항변을 멈추지 않기. 빌리에게 춤은 언제나 어머니라는 초월적 영역의 수신자를 전제로 한 발화 행위였다. 영원한 사랑과 지지를 약속한 이가 있었기 때문일까, 빌리의 춤에는 하등 망설임이 없다.


재키 엘리어트는 단 한 번도 발레를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와 같은 종류의 낯선 것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겠지만 아들의 무언의 항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꽂혀 들어온 몸짓 언어는 직관적으로 독해한 게 분명하다. 이해는 하더라도 이를 말로 변환할 재간은 없는 터. 재키는 아들에게는 집에 가라고 소리친 뒤 그대로 발레 선생인 윌킨슨 부인의 집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는 정말 제대로 '알아들은' 게다.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 오디션에서 선택한 춤은 아버지 앞에서 추었던 춤과 거의 동일하다.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면서도 흥미로운 장치인데, 빌리가 윌킨슨 부인과 함께 즐겁게 연습하던 '아이 러브 부기'나 면접관들이 쉬이 감정이입을 시도할 수 있을 법한 감동적인 소재(엄마의 편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자기 열망을 표출해 보일 때 쓰였던 바로 그 음악과 춤을, 권위 있는 발레학교로 들어가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시험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해 보이길 선택한 것이다. 흔히 상징계로 일컬어지는 제도권이 정신분석학에서는 아버지의 영역으로 명명된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빌리가 마주한 두 번째 아버지는 첫 번째 아버지보다 더 까다롭다.


빌리의 춤을 본 면접관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후에 정중앙에 앉은 남성 면접관이 빌리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강조하는 윌킨슨 부인의 열성적인(enthusiastic) 편지를 받았다고 말해주지만, 윌킨슨 부인의 텍스트(활자)만으로 그들이 빌리의 낯선 컨텍스트 속에서 태어난 텍스트(춤)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정부를 상대로 승산 없는 파업을 지속하고 있는 탄광 지역의 거주민, 노동자 계급 가정의 둘째 아들, 어머니를 여읜 열한 살 꼬마, 우아함과 정합성과 기교보다는 뻗고 내지르고 발을 구르는 동작이 더 익숙한 아이. 면접관들이 주로 상대하게 되는 대상은 에버링턴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노동자 파업보다는 대성당을 먼저 떠올리고, 몇 번 낙방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다시 오디션을 보러 올 수 있는 그런 소년들이었다.


빌리 또한 면접관들이 자신의 춤을 독해할 수 없다는 걸, 자신이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저 본능의 이끌림에 따라 춤췄던 빌리가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할 필요 앞에 내던져진다. 계속 춤추기 위해서는 계급도, 이해관계도 다른(즉 자신의 컨텍스트와는 무관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설득하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몸짓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은 빌리가 여태껏 고려해 본 적 없던 것이고, 자신의 역량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것이다. 빌리는 전에 없이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관들은 빌리라는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에 접근하려 시도한다. 부자(父子)를 앞에 두고 던지는 몇 가지 질문이 그것이다. 말주변 없는 엘리어트 부자는 이들의 시도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 "잘 모르겠어요.", "음... 없어요."와 같은 단답만 반복할 뿐이다. 문을 나서기 직전 (지금까지 일언반구 없었으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던) 금발의 여성 면접관이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빌리?

Just one last question, Can I ask you, Billy?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What does it feel like when you're dancing?



"잘 모르겠어요...

I don't know...


(또! 다들 소리 없이 탄식하는 와중에 빌리는 천천히 설명을 시도한다.)


그냥 기분이 좋아요.

         Sort of feels good.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It's sort of stiff and that... but once I get going, then I, like, forget everything...

 

그리고... (내가) 사라져 버려요.

and... sort of disapprear.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Sort of disapprear.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Like I feel a change in me whole body.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요.

         Like there's a fire in me body.

 

전 한 마리의 새가 된 것처럼 날아올라요.

I Just there... flying like a bird.

 

감전된 것처럼....

         Like electricity....

 

네... 감전된 것처럼요."

Yeah... Like electricity.





빌리의 최초의 답변("잘 모르겠다")은 아주 정직한 것이다. 신체 행위에서 오는 정동을 언어의 그물망 안으로 포섭하여 전달하는 일은 재키 엘리어트의 사례가 보여주듯 대단히 어렵고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빌리는 시도하고, 이 시도를 통해 일종의 번역이 이루어진다. 빌리의 답변을 듣는 도중 시시각각 변하는 면접관들의 표정과 서정적인 스코어의 삽입은 빌리라는 낯선 텍스트에 그들이 부분적으로 접속했음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연출이다. 때로는 부분적인 접속이 전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해 주지 않던가. 부분을 제대로 읽어내는 게 전체 집합의 다른 모든 부분을 따져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이를테면 예술학교의 신입생 면접 같은 자리가 그렇다.


때로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사후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오디션에서 보여준 뻗대고 쿵쿵대는 그 모든 동작은 빌리 엘리어트라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제 면접관들은 빌리 엘리어트를 어렴풋이나마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이 소년,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난 소년, 당장의 조건과 자질만 본다면 제도권에 편입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역능, 잠재력, 가치, 무어라 하는 게 좋을지, 어렵구나, 어려워. 이 또한 말로 번역되기 힘든 그 무엇이구나, 어쨌든 이 아이에게는 역량, 잠재력, 무언가가 있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아이의 열정만을 높이 사서, 아이의 환경에 대한 연민만 가지고 합격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언제나 제도와 의미가 포획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비록 그 예술이 왕립 발레학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강력한 후원 아래 있을지라도) 시도하고 번역하고 표현하는 과정이다. 제도의 일부이자 예술의 매개자인 면접관들은 빌리 엘리어트라는 텍스트에서 그와 같은 과정을 감당해 낼 가능성을 발견하고, 설득당한다.




빌리는 활자라는 텍스트(합격 통지서)를 통해 두 번째 아버지로부터 승인받는다. 남은 것은 도약과, 도약을 위한 부단한 시도뿐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빌리는 이 또한 멋지게 성공해내지 않았던가. 윌킨슨 부인에게 처음 들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던 <백조의 호수> 텍스트를 25세의 빌리는 완벽하게 이해하여 몸에 입었다. 빌리는 날아오른다. 첫 번째 아버지의 눈 앞에서, 두 번째 아버지를 딛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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