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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6. 웃었다가 울었다가

Chapter 1. 이별을 인정하다 (3)

by 이그나이트

민영이가 남자를 끌어안았다.


“어?”


남자가 놀랐다.


“내 볼에 키스해줘요.”


민영이가 귀에 속삭였다. 남자는 당황해서 몸이 뻣뻣했다.


“지금 하세요.” 민영이가 다시 말했다.


남자가 민영이를 조금 떨어뜨리고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지만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민영이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남자가 볼이 아니라 입술에 입을 댔다. 민영이는 가만히 있었다. 잠깐의 뽀뽀가 끝났다. 남자가 민영이를 꼭 안았다.


“처음 만난 날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나 좀 떨려요. 괜찮은가요?”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요. 괜찮아요. 전화하세요.”


민영이가 남자 등을 토닥였다.


민영이가 집으로 몸을 돌리며 현욱이가 있던 자리를 봤다.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영이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텔레비전을 보던 엄마 아빠가 눈을 반짝이며 민영이를 쳐다보았다.


“여태 같이 있었어? 괜찮았어?”


엄마가 민영이를 꼼꼼히 살펴보며 물어봤다.


“그냥 그랬어요.”


“그래? 어머어머 너 맘에 들었구나? 잘 됐다. 어떤 사람인지 뭐 했는지 여기 앉아서 말해봐.”


엄마가 민영을 소파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민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피곤해요. 일단 좀 잘게요. 내일 이야기할게요.”


엄마는 그래도 방으로 따라 들어가며 민영의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엄마를 불렀다.


“여보, 이리와.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아니 내가 뭘, 엄마가 물어볼 수도 있지.”


“아이고, 그냥 이리 와서 나랑 연속극이나 봐. 이리 와요.”


엄마는 투덜대면서 민영이 한번, 아빠 한번 쳐다보더니 입을 삐쭉이며 아빠가 시키는 데로 민영을 놔주었다.

민영은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방바닥의 나무 바닥의 결을 쳐다보았다. 한 참 넋을 놓고 있다가 민영은 깨달았다.


정말 헤어졌다는 것을.


꽤 오랜 시간 헤어지는 것이 맞다고, 헤어져야 한다고, 헤어지자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해온 그 ‘이별’을 정말 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진짜 이별을 한 건가? 이젠 정말 다시는 현욱 오빠를 보지 못하는 건가?’


민영은 두려워졌다.


이젠 출근길 퇴근길에 전화할 사람도, 나의 일상을 나눌 사람도 없고, 주말의 즐거움을 함께 할 사람도 없다.

이젠 같이 술 먹어줄 사람도 없고, 추울 때 안아줄 사람도 없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정말 외롭게 살 수 있을까?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아직 못했던 것 아닐까?


지금 내가 잘 못 한 것인가?


그러자 마음 한쪽에서 아주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아니라고 잘 했다고 그 목소리가 말해주었다.


이렇게 안 했으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몰라. 세상이 모두 반대하고, 당사자도 내키지 않아하는 결혼 억지로 해서, 가난과 애정 결핍으로 불행해지는 것보다 낫고, 아님 더 비참하게 내가 차이는 것보다도 나을 거야.

힘들겠지만 잘 했어. 사랑해도, 예전 같지 않은 것 알았잖아. 오래전부터 언젠가 이별을 할 것이란 것도 알았잖아. 사람들에게 헤어졌다고 거짓말하면서 연습했잖아.


그리고 현욱 오빠한테 계속 말했잖아. 나 힘들다고, 붙잡아 달라고. 그래도 무시하고 모른 척 한 사람이야. 얼마나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비참해질 거야.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말해도 못 알아들을 사람이고.


이렇게 안 했으면, 더 힘들어졌을 거야. 현욱 오빠도 충격 먹고 연락 안 오고. 오래 준비한 이별 깔끔하게 잘 해결한 거야.


괜찮아 잘 했어.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잘 한 것일까? 이게?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난 이런 여자가 아니었는데.


민영이는 본인이 더럽게 느껴졌다. 현욱 오빠와 이별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던진 것 같았다.


민영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억울했다. 나를 밀어낸 것은 그 남자인데. 이별을 감당하기 위해 자해한 것은 나였다. 민영은 눈물을 쏟으며 우는 소리가 가족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을 막았다.


전화가 왔다. 선을 본 남자였다. 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예요. 잘 들어갔어요?”


“네. 그쪽은요?”


“에이, 이제 그쪽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오빠라고 해요. 헤헤.”


남자가 수줍게 말했다.


“아... 네...”


“난 지금 호텔 주차장이에요. 내 차에 왔어요. 집에 갈려구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난 술이 조금 오르는 것 같아서 잘려구요.”


“아...... 그래요. 피곤할 거예요. 내일 연락할게요. 잘 자요.”


남자는 아쉬운 티를 많이 냈지만. 민영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다시 한 번 훔쳤다. 그리고 결심한 듯 현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해하던 민영은 결국 통화가 연결되지 않자 안심의 한숨을 내 쉬었다. 왠지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걸었지만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사과도,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붙잡고 말하고 싶은데, 친구가 현욱 밖에 없는 것 뿐이었으니까.


민영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카톡 창을 열었다.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몇 번을 하다가 현욱과 나눈 대화들을 쭉 읽어보았다.


[사랑해.]

[사랑해]

[미안해]

[기다려, 믿어줘]


지난주에 현욱이 민영에게 해주었던 말들이었다.


몰래 민영의 모습을 찍어 보낸 사진들도 있었다. 다정하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기억났다.


현욱이 얼마나 다정한지, 얼마나 진심으로 민영이를 사랑해줬는지,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민영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인데, 사랑했는데, 날 사랑해 줬는데. 왜? 나는 이 사람을 밀어내지 못해서 안달이었을까? 왜? 머리는 이게 현명한 것이라고 자꾸 말하고 날 이렇게 만든 것일까?’


민영이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랑을 놓은 것은 현욱이 아니라 본인인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배반한 것도 본인이고, 배려하지 못한 것도 본인이었던 것이다.


민영이는 비겁한 본인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맨 정신으로 헤어질 자신도 없어서, 술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하고, 일부로 다른 남자까지 동원해서 유치하게 이별을 통보한 본인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현욱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것도 아니었다. 사랑에 미련을 두고, 주저하는 본인에게 이별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나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게 이별을 선택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한 것이다.


얼굴 보고 진지하게 진심으로 내 심정과 내 결론을 말하고, 이해시키고, 반듯하게 헤어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을, 현욱과 처음 보는 죄 없는 남자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바보 같은 일을 벌여버린 자신이,


바보 같은 자신이,


민영이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민영이는 울고 또 울고 꺽꺽 숨을 쉬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때 현욱에게 전화가 왔다.


민영은 울리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무섭고 미안해서 받을 수가 없었다. 우는 핸드폰이 지쳐 꺼질 때까지 민영은 그냥 같이 울며 전화기에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_r99Doh6yQ

[Music Video] 이그나이트 - 웃었다가 울었다가 (Vocal by 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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