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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Aug 12. 2016

[소설] 51. 웃었다가 울었다가

Chapter 2. 대일밴드를 떼다 (1)

하하하. 핸드폰에서 플레이되고 있는 동영상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케이블 코미디 프로그램인 SNL 코리아의 한 장면이었다. 성적인, 약간 더러운 농담이었다. 나는 웃기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낄낄거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핸드폰 영상을 보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자기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영상을 보여주는 남자에게 나는 예의상 웃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재밌지요?”


“네. 생각보다는 재밌네요.”


“그쵸? 꼭 보세요. 보다 보면 중독돼요. 이건 사실 재미없는 편이에요. 제가 급한 마음에 이것밖에 못 찾았는데. 다음에 더 재밌는 거 찾아서 보여드릴게요. 요즘 이 프로그램 보는 게 제 취미거든요. 진짜 웃기고 스트레스 풀려요.”


남자는 뿌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를 웃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친척 누군가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인데, 사법 연수원에 다닌다는 이 사람은 한눈에 봐도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유머를 보여준답시고 성적인 농담이 담긴 동영상을 틀어줄 정도니까 말이다.


“민영씨는 뭐 좋아하는 거 있어요?”


“뭐... 딱히 없어요.”


“그래요? 전 책도 좋아하구요. 영화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해요. 아.. 얼마 전에 보고 싶은 영화 개봉했는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


“아... 요즘 일이 많아서요. 아빠가 요즘 제가 미운지 일을 엄청 많이 줘서 거의 매일 야근하고 그래요.”


“아. 맞다. 아버지 회사에 다닌다고 했었지요? 좋겠어요. 부럽네요. 난 가끔 우리 아빠도 변호사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많이 해요. 웃기죠? 보통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하는 생각이니까요. 하하. 그런데 좀 이상해도 정말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집에 오면 아버지 어머니가 오늘은 뭐 했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답답하거든요. 아버지는 이 쪽 일은 하나도 모르는 그냥 직장인이니까요. 아무튼 아버지랑 같은 일 하니까. 아버지랑 편하게 이야기하고 사이도 좋고 그렇겠어요.”


“네? 뭐 아빠랑 딱히 할 말 없는데요. 내가 비서도 아니구요. 그리고 아빠랑 할 말이 뭐가 있어요? 보통 부모랑 얼굴 볼 시간도 없지 않나요?”


“아... 그런가요? 그래도...... 아버님이 대표면, 데이트해야 한다고 하면 야근 빼주시지 않을까요?”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아... 하. 하.’ 하고 웃으며 물을 마셨다.


집에 들어오자 저녁을 먹고 있던 엄마, 언니, 그리고 조카가 일제히 민영이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왜 또 여기 있어?”


“형부랑 싸웠어. 게다가 형부 오늘 밤 수술인지 뭔지 모르지만 암튼 늦게 온데. 짜증 나.”


“허구한 날 싸우고 그게 뭐냐?”


“너야 말로 지금 뭐야? 오늘 선본다고 안 했어?”


“보고 온 거야.”


“또 별로야? 한 시간은 만나고 온 거야? 사람을 좀 진득이 봐야 판단이 되는 건데, 쓱 보고 맘에 안 든다고 벌떡 일어나면 어떡해?”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려다 엉거주춤 그냥 선 채로 엄마의 잔소리를 맞았다.


“아 몰라. 이상한 남자였어. 처음 만난 날에 무슨 동영상이나 보여주고. 그것도 야한 거 보여주고, 짜증 나. 변태 같아.”


“야. 너도 서른이야. 이제 눈 좀 낮춰야지. 안 그러냐?”


엄마가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언니가 고개를 저으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왜? 민영이야 말로 낮출 눈이 어딨어? 그리고 엉뚱한 사람한테 가는 것보다는 혼자 사는 게 낫지. 주중에 일하고 엄마 수발받으면서 살다가, 주말에 데이트하고 지내면 되잖아. 결혼해보니 여자는 결혼하면 무조건 손해라니까.”


조카가 입을 벌리자 언니가 입에 밥을 넣어주며 말했다.


“엄마, 나 고기 주세요.”


“오냐오냐, 우리 공주님 많이 먹어요.”


언니가 조카 머리에 뽀뽀를 하며 반찬을 입에 넣어주었다.


“야! 넌 새끼까지 낳아놓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언니가 되가지고 동생 짝 찾을 생각도 안 하고 그따위로 할 거면 여기 오지 마! 언니가 돼서 동생 시집보낼 생각을 해야지.”


엄마가 언니한테까지 화를 내며 말했다.


“아무튼 정말 별루예요. 그리고 내가 재벌집 딸도 아닌데, 아빠 회사 다닌다니까 꼬치꼬치 물으면서 더 들이대는 것 같았어. 알량한 우리 집 재산에 눈독 들이는 거 같아서 진짜 맘에 안 들었어요. 엄마 그런 남자 좋아요?”    


“어?...... 그건 아니지. 개천용이라고는 하더라만...... 아직 그 정도는 싫긴 하지......”


“나 들어갈게요.”


나는 가방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조카에게 건네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잡았다. 미드를 틀었다. 그런데 볼만한 드라마가 없었다. 몇 달째 드라마만 주구장창 봤더니 안 본 드라마가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이것도 웬만한 것은 다 봐서 딱히 볼만한 것이 없었다.


침대에서 뒹굴 한번 몸을 뒤집었다. 잠이나 자자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실이 너무 시끄러웠다. 예린이가 노래를 부르는지 엄마와 언니가 박수를 치며 난리를 부리는 것 같았다. ‘치, 무슨 한류스타 납셨나.’ 나는 괜히 코웃음을 쳤다.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네이버에 취미를 검색했다. 여행, 독서, 만들기, 운동 등 여러 취미에 대한 포스팅이 쭉 나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사진 동호회는 이제 더 이상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들은 찝적대려고만 하고, 정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결국 다 인터넷에 있기에, 굳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행? 몇 번 여행을 다녀봤지만 도시는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그렇다고 회사도 안 나가고 산간 오지를 찾아 자연경관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내가 고고학자도, 미술 전문가도 아니기에 아무 장소도 관심 없었다. 미술 작품이나 역사 관련은 그냥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휴양지를 가는 건 더 처량 맞기도 했고, 솔직히 그렇게 쉴 바에는 그냥 집에서 누워서 쉬는 게 훨씬 더 편했다. 리조트에서 잠이나 자려고 비행기까지 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구 만들기? 이건 사실 조금 관심이 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결혼하고 내 집을 꾸밀 때면 모를까. 지금 내 방은 10년 전부터 고급 수입 가구로 이미 다 자리 잡았기에 새롭게 만들고 싶은 아이템 자체가 없었다.

미술은 색칠공부도 못하는 막손이라 싫었다. 뮤지컬은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는 좋지만, 팬질이니 덕질이니 할 만큼 재미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비쌌다. 그 값이면 그냥 오페라를 보거나, 라이브 영상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검색을 한 결과, 그냥 오징어 먹으면서 영화나 드라마 다운받아 보는 게 역시 제일인 것 같았다.


나는 화장품 냉장고를 열고 숨겨두었던 맥주를 꺼냈다. 취미 검색은 무슨,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네이버 실시간 검색이나 뿜 베스트를 무표정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민영아, 예린이가 니 방에서 색연필 봤다는데.”


언니가 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뭐야! 노크 좀 해!”


언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야 말로 지금 뭐 하는 거야?! 엄마도 조카도 집에 있는 데 방에서 술을 처먹어? 어디서 못 배운 짓을 하는 거야?”


“내 방이야. 그리고 이제 서른인데, 내가 맥주 한 캔도 맘대로 못 마시냐?”


나는 오기로 더 보란 듯이 맥주를 벌컥 마셨다.


“니 방 같은 소리 하네, 엄마 아빠 집이거든. 엄마가 보면 뭐라고 하실 것 같아.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야! 너 그 가난뱅이랑 헤어졌다고 이러는 거야?”


“뭔 소리야?”


“너 요즘 계속 짜증만 내고, 방에 틀여 박혀서 오밤중에 귀신처럼 몰래 술 처먹고, 주말이면  씻지도 않고 방에 박혀서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다면서. 아빠가 그러는데 회사에서도 일 이상하게 해놓고 딴짓한다면서. 왜 나이 다 먹고 안 하던 짓 하고 그러냐고. 왜 멀쩡한 애가 이렇게 이상하게 바보가 돼가냐고. 그게 다 그놈의 자식이랑 헤어졌다고 지금 시위하는 거 아냐. 야! 그 나이 먹고 사방팔방에 나 남친과 헤어졌소! 하고 쑈 하고 다녀야겠냐? 쪽팔리지 않냐?”


“언니가 뭘 안다고 그래!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본 주제에.”


“뭐? 웃기셔. 결혼도 못한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사랑을 못해봤다는 거야.”


“칫! 결혼만 한 거지. 사랑은 아니잖아. 형부가 의사니까 결혼했잖아.”


“뭐라고?! 왜? 왜? 그렇게 생각해?”


언니가 진짜 충격을 받은 듯 되물었다. 나는 맥주캔을 들고, 비웃으면서 말했다.


“의사니까 좋다고 선보고 바로 결혼한 거잖아.”


“선으로 만나서 한 눈에 반했고 그래서 결혼한 거지. 그 사람이 의사인 것 까지 감수하면서.”


“웃기시네. 허구한 날 싸우면서. 그리고 형부가 의사가 아니었으면. 그래도 결혼했을까?”


“당연하지. 난 니 형부 잘생겨서 반했으니까. 그리고 다들 싸우고 화해하면서 사는 거지. 그렇다고 사랑 안 하는

건 아니야.


아...... 아하! 알겠다. 너는 그럼 꼭 가난한 사람이랑 만나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로맨스 소설 쓰냐? 웃기고 있네. 난 니 형부 사랑해. 형부도 날 사랑하고. 사랑하는데 의사였고, 사랑하는데 내가 부잣집 딸이었던 것뿐이야. 조건을 따진 건 따진 거고, 그거랑 별개로 사랑하니까 결혼한 거라고. 그래 봤자 결혼도 못한 어린애가 이해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나도 가난한 사람이랑 연애했었어. 심지어 그 남자가 날 찼어. 그때 나도 다 힘들었어. 그래도 너처럼 사방팔방에 쑈는 안 했어. 쪽팔리니까.


어차피 숨 쉬고 살 건데 왜 그렇게 시간 낭비하냐? 너만 잘나고, 너만 사랑하고 너만 이별한다고 생각하지 마. 꼴값 떨지 말고 정신 차려. 술 그만 마시고. 엄마 아빠 너 때문에 늙는다. 니가 부모 마음을 알아?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어휴 때릴 수도 없고. 빨리 그거 버려!”


언니가 버럭버럭 화를 내더니 분에 못 이겨 방을 나갔다. 나는 흥!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맥주를 음미하며 마셨다. 그리고 보란 듯이 냉장고에서 또 한 캔을 꺼냈다.


두 번째 캔을 때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형부가 잘생겼다는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대머리인 형부를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사랑도 이별도 못해본 주제에 어디서 잔소리질인가 싶었다. 나는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민영아! 너 회사 안 가니? 어머 이게 뭐야!”


엄마가 벌컥 문을 열며 들어오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방안에는 어젯밤에 먹은 맥주 캔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혼자 마시다가 귀찮아서 그냥 잠들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한두 캔 마시고, 술병은 치웠는데, 이젠 치우지도 않으니까 엄마가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척, 이불을 더 뒤집어쓰며 눈을 감았다.


“너 정말...... 에휴...... 어휴~~~ 이 냄새 어쩌냐. 민영아 얼른 씻고 출근해. 아빠가 지금 화 많이 나셨어. 지각하면 안 된다. 일단 얼른 출근해.”


“아이. 지각 안 해요. 회사 30분이면 가는데. 술 도 좀 마실 수 있지 뭐......”


나는 중얼거리며 엄마를 피해 슬쩍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방은 벌써 대강 치워져 있었다.

나는 옷을 입고, 엄마 얼굴도 보지 않고 출근을 했다.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9시 3분이었다. 나는 쭈뼛쭈뼛 들어가야 하나. 당당하게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사무실 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빠가 떡 하니 계셨다.


“너 이제 오냐?”


“죄송합니다.”


“너 어제 엄청 실수한 거 알아? 내가 약속 있어서 나가는데, 너 저녁때 보자. 알았지? 퇴근하지 말고 있어.”


“네.”


내가 어제 뭘 실수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각도 했기에 일단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아버지를 배웅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다들 한 번씩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김부장님이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방금 대표님과 만났지요? 금방 나가셨던데.]


[... 네 ㅠㅠ]


[5분 늦은 건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님이 그런 점에서 엄격해서 그렇지 사실 별거 아니잖아요.]


[아니에요. 1분도 안 늦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지요. 아빠한테 혼나야 해요. 그리고 부장님께도 혼나야지요. 요즘 좀 아슬아슬한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그러지 마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걱정 말고 일하세요. 대표님은 이따 제가 또 잘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신경 쓰지 말고 이따 점심때 봐요]


나는 파일을 켜고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집중이 쉽게 되지 않았다. 속은 쓰렸고, 머리는 아팠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출근 시간이 끝난 강남 거리는 한산했다.


하릴없이 메일 확인하다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접속해서 오늘의 핫딜을 검색했다. 화장품, 옷, 가전제품 등등 하나씩 둘러는 보았지만 딱히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가요]


오전 내내 인터넷 쇼핑 사이트만 둘러봤는데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김부장님은 오늘은 낙지집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여기는 연포탕도 맛있데요. 연포탕 2인분, 낙지볶음 2인분 해서 다 같이 먹으면 어때요?”


이회계사님이 ‘좋아요.’라고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회계사님 어제 선 본거 어땠어요?”


김부장님이 테이블 위로 몸을 올리며 물어봤다.


“그냥, 그랬어요. 모르겠어요. 연락은 왔는데, 대답도 안 했고요.”


“왜요? 별로 나쁘지 않으면 3번은 만나봐요.”


“그냥, 만나면 뭐해요. 그런다고 없는 감정이 생길 것도 아닌데요. 그렇다고 무슨 취직하는 것처럼 조건만 보고 결혼할 수도 없고.”


“그쵸, 조건만 보고 결혼할 수는 없지요. 사랑을 해야지.”


승민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나이트에서 만난 나이 많은 남자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시댁이 부자라고 냉큼 결혼한 사람이 할 말이 아닌 듯 했다.


“승민씨는 뭘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요?”


빈정거리는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승민씨에게 질문을 했다.


“음...... 두 번째 데이트에 동물원에 갔어요. 길을 걷는데 남편이 갑자기 멈추더니 무릎을 꿇고 내 운동화 끈을 고쳐주더라구요. 그리고 휴지로 신발도 닦아주고. 거침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서슴없이 무릎을 꿇어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안 반해요. 그 순간부터 손길 하나하나가 다 젠틀하고 매너 좋게 느껴지더라구요.”


나는 남들 모르게 입을 삐죽했다. 그 정도는 현욱 오빠도 해줬던 거다. 그 정도로 사랑했다면 본인은 이미 현욱과 결혼을 했어야 했다. 나는 으응 거리며 방금 나온 낙지볶음에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랑 결혼하니 얼마나 좋아? 요새 좋지?”


김부장님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승민씨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 좋은 것도 있는데, 또 싫은 것도 있어요. 결혼하고 같이 살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같이 사니까 자주 싸워요.”


“왜?”


“시댁, 돈, 청소, 설거지 같은 거지요. 사소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암튼 생각보다 자주 싸워서 요즘 좀 힘들어요.”


"에이, 그러지 마. 사랑하는데 왜 싸워. 좋은 시간 아끼면서 잘 보내요. 좀 져주기도 하면서 맞춰 살아요.”


이혼 경험이 있는 이회계사님이 말하자 왠지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러자 김부장님이 갑자기 박수를 딱 치더니 말했다.


“저...... 나 애인 생겼어.”


모두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얼마 전에, 아빠가 입원하셨잖아요. 그래서 밤마다 병원에서 자고 그랬잖아. 근데 옆 침대에 아줌마도 아들이 종종 와서 자고 가고 하더라구. 그러다 엄마들끼리 분위기도 만들어 주고, 그러다가 퇴원해서 연락도 오고, 호호 일단 요즘 만나고 있어요.”


“대박. 완전 드라마 같아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작은 호프집 한데. 그쪽도 부모님이랑 같이 살면서 어영부영 노총각이더라구. 나랑 동갑이야.”


“어머 축하해요. 나이도 좋고 잘 됐다.”


나는 ‘그 나이에 가난한 집 아들 만나서 친정, 시댁 4명을 부양하고 살려면 쉽지 않을 텐데 꼭 그런 남자랑 연애해야겠어요? 사랑을 안 하고 말지, 왜 만나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툭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키고 이회계사님이나 승민씨 얼굴을 봤다. 축하한다며 웃는 그 얼굴들이 다들 가식으로만 보였다. 저들도 김부장님이 지금 외로움에 치여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을 알 거다. 나는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밥을 먹었다. 매웠다.


“그럼 금방 결혼하시는 거예요?”


승민씨가 해맑게 물었다.


“결혼은...... 좀 생각해야지. 사실 나이 드니까. 연애하고 사랑하고 싶기는 한데. 결혼은 좀 그래. 나도 우리 집 생계를 책임지고 있고, 그 남자도 그렇고, 또 나이 먹고 보니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커. 지금이 편하니까. 사실은...... 나 곧 마흔인 거 알지요? 그래서 그냥 말할게요. 동거할까 의논 중이에요.”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요즘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굳이 결혼해야 하나. 굳이 사랑해야 하나. 뭐 주말에 심심하니 연애 정도 하면 좋겠지만, 사랑도 뭐 별거 아니고, 특히 결혼은 왜 해야 하나. 이 즐겁고 편한 생활을 왜 포기하나 그런 생각 들거든요. 결혼은 반대예요.”


나는 나와 같은 마음이란 생각에 반가워서 속마음을 뱉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괜히 말했나 후회를 했다.


“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용하던 이회계사님의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어... 오히려 전 이회계사님이 결혼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승민씨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니요. 결혼하세요. 난 이혼한 거는 후회 안 해요. 특히 내 자식까지 빚지게 산다고 생각하면 백번 생각해도 잘한 거지 싶어요. 하지만 적당히 좋다면 결혼하세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지인으로 참석할 건지, 상주가 돼서 위로받을지의 차이인데, 사랑하면 다 감수하고 결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나는 욱하는 마음에 소리쳤다.


“근데 왜! 그 사람은 날 감수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들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다.


“죄송해요. 그냥 난......”


이회계사가 냅킨을 건네주며 말했다.


“모든 사랑이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지는 않아요. 그래서 결혼을 축하하는 거죠.”


승민씨가 말했다.


“민영회계사님, 왜 헤어지신 건데요? 그만큼 힘들면 연락하시면 안 돼요? 다시 만나면 안 돼요?”


김부장님이 승민씨에게 눈 짓으로 그만 하라고 했다.


“어휴......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냥 억울해서요. 그 사람은 왜 날 밀쳤을까? 그때 왜 날 잡지 않았을까? 분명 사랑했는데. 분명 날 좋아했거든요. 근데 아무튼 끝났어요.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평범하게 끝났어요. 그리고 그냥 머리가 복잡해요.”


나는 간신히 이성을 잡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거기까지였던 거야. 인연이. 주어진 사랑도 다 충분히 태웠다고 생각해. 그리고 모든 사랑은 끝나면 다 평범해. 다음 사랑이 올 거야. 더 특별한 사랑이.”


이회계사님이 말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와서 ‘연포탕 다 식었네.’ 하더니 가스 불을 켜줬다.


넷은 우물쭈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넋 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너무 창피했다. 사람들한테 이런 속

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https://www.youtube.com/watch?v=__r99Doh6yQ&list=PL0jpwetiOTqiKHxtL2U0CWY9kpcbRHmKM

[Music Video] 이그나이트 - 웃었다가 울었다가 (Vocal by 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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