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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0. 잘살아

Chapter 1. 나는 살아가야겠지, 아직은 그녀의 흔적이 있지만(3)

by 이그나이트

결과적으로 아이디어를 창수에게 팔아서 월급쟁이가 된 현실에 내가 너덜너덜 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 돈 들어가지 않고 테스트를 할 수도 있었고, 그래도 친구라도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상사보다는 어떤 점에서 편하기도 했다. 어차피 핵심 아이디어는 훗날을 위해 아껴두면 된다. 어쨌든 창수 아버님 말씀대로 자존심은 상해도 나에게 기회는 맞았다. 감사해야 했다.

나는 창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장부는 엑셀로 잘 정리해서 보낼게. 그럼 오늘 회식할 테니 시간 되면 들려 이사님이 직접 직원들 격려하면 좋잖아. 츄리닝 입고 와도 돼 ㅋㅋ 직원들이 창수 이사장을 아주 개성 있다고 좋아하거든.]






창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화장실에 가려고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윤서가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오윤서, 너 뭐하냐?”


“네. 선생님. 기분전환 삼아서 청소하고 있었어요.”


윤서가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너 청소하라고 시켰어?”


“네? 아니요. 아무도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요. 그냥 쉬는 시간에 잠깐 한 거예요.”


“너 지금 장난해? 너 청소하라고 돈 주는 줄 알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계약서 잊었어?”


나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쳤다. 강사들이 모여들었다.


“원장님, 무슨 일이세요?”


직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누구 윤서한테 눈치 준 사람 있어? 다들 뭐 착각하나 본데. 윤서는 모델이야. 상고 출신 공부 시켜서 꼴통도 인 서울 간다고, 명문대 간다고 홍보하려고 투자하는 거야. 근데 지금 얘가 왜 청소를 하고 있는 거야? 어?


야! 오윤서 잘 들어. 니가 왜 그동안 찌질하게 살았는지 알아?


바로 이렇게 중요한 게 뭔지, 주제가 뭔지 파악을 못해서야.


지금 너한테 중요한 것, 너의 주제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걸 기록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서울대 들어가서 돈 값 하는 거야. 그러라고 공부시키고 돈 주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맡은 일이 뭔지 잘 알아.


잘 봐! 저기 너랑 동갑인 카이스트 선생은 강의가 맡은 바 임무야. 저기 데스크에 너보다 나이 많은 실장님은 상담이 임무고, 오늘 저녁에 오실 내 어머니뻘 되는 분은 청소가 임무고, 니 임무는 성적을 올리는 거라고!!


지금 모의고사가 코앞이고, 서론, 본론, 결론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지금 니가 청소를 할 때라고 생각해?


공부하기 싫어? 청소하고 싶어?

그럼 청소해. 다시 계약서 써! 청소부로 계약서 쓰라고! 그게 니가 바라는 거야?”


오윤서는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그러나 훌쩍이거나 징징대지는 않았다. 윤서는 눈물을 쓱 닦더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 일 열심히 하고, 공부만 하겠습니다.”


“정신 차렸어?”


“네.”


“들어가서 오늘 2시간 더 공부해. 밥도 먹지 말고 공부반 해. 알았어?”


“네.”


“들어가.”


윤서가 빗자루를 내려놓고 자습실로 갔다. 구경하던 강사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흩어지려고 했다.


“다들 멈추세요. 내가 지금 화가 난 건, 학원 오픈하면서 첫 번째로 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홍보 행사를 하고 있지만, 장기 홍보 프로젝트인 오윤서는 그만큼 중요해요. 앞으로 지금처럼 윤서가 공부 안 하고 딴짓하면 다들 제대로 선생 노릇하기를 바랍니다. 알았습니까?”


강사들이 우물쭈물 ‘네’라고 대답했다.


“그럼 다들 자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위에 앉았다. 내 나이 31살, 물론 학생들을 혼낸 적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아니, 이렇게 소리치며 화내는 장면을 본 적도 없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잘 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강사들이 성질 나쁜 원장 때문에 일 그만둔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됐다. 나는 꽤 오래 화장실 안쪽에 있다가 천천히 교무실로 갔다.


데스크의 상담 실장님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43살의 대형 학원 경력이 많은 선생님이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경력과 인맥에 모셔온 상담 선생님이었다.


“원장님, 잠깐 커피 한잔 하실래요?”


나는 강하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가뜩이나 어린 원장인데 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아니요. 바쁩니다. 가서 일 보세요. 커피 마실 시간 없습니다.”


실장님은 눈치껏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숨을 고르고, 메신저로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딱딱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분위기 좀 잡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나 대신 강사들에게 내일이나 모레, 저녁 퇴근 후, 삼겹살 회식하자고 전달하세요. 이사님이 회식비 50만 원 지원하셨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제가 내겠습니다.


그리고 오윤서 식사는 학원에서 밥 사주는 거 맞지요? 오늘 저녁은 실장님이 데리고 나가서 좀 든든히 먹여주세요. 그리고 비타민제 한 통 사주면서 응원해주세요. 이사님이 윤서에게 기대가 큽니다. 현재 실적이 없고, 당장 다음 입시철에 보여줄 모델도 없어서 꼭 필요한 아이이니까요.]


[네. 알았습니다.]


[내일 1시에 회의 아시죠? 학부모, 학생 관리, 새로운 마케팅 홍보 관련 회의 준비 부탁합니다.]


[네, 알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실장에게 지시하고 나는 각 팀장들에게 내일까지 첫 달 수업 분석 및 6개월 수업 계획의 수정본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키고, 나는 혼자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똑똑. 오윤서가 노크를 하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원장님.”


“어? 아직 안 갔어?”


“네. 오늘 두 시간 더 공부하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 소리친 것도 사과해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체면이 상할까 봐 하나도 안 미안한 척했다.


“어... 그래. 수고했다. 차 끊기기 전에 얼른 들어가.”


“저...... 원장님 오늘 죄송했습니다. 말씀대로 공부하는 게 좀 힘드니까 딴 걸로 메꾸려고 했나 봐요. 바보 같죠. 공부를 못하면 공부로 메꿨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머리가 나쁘니까 실수를 하네요.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하겠습니다.”


윤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안경을 쓰고, 치마가 붙어있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살이 더 빠졌는지 턱이 뽀족해지고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좀 불쌍해 보였다. 몇 년 전 군대 휴가 나왔을 때 학원에서 나오던 민영이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민영이를 지워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열심히 공부해. 너도 이런 기회 흔치 않을 거야. 서울대, 아니 인 서울까지만 가도 넌 대박이야. 입학만 하면, 학원에서 바로 강사 하면서 돈도 벌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잘 해봐. 우리도 여러 전형 연구해서 꼭 입학시키고 말 테니까. 알았지?”


“네.”


나는 지갑을 꺼냈다. 현금이 없었다. 카드를 꺼내 윤서에게 건넸다.


“이걸로 택시 타고 가. 카드는 내일 돌려주고. 빨리 들어가.”


윤서가 가까이 와서 카드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 원장님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공부시켜주시고 기회 주신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원장님께서 오늘 주신 교훈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주제와 목적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요. 제겐 엄청난 교훈이었어요. 스물이 넘어서 방황도 하면서 좀 바보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아주 명확해졌어요. 목표가 없어서 그랬다는 걸 알았거든요. 선생님 말씀대로만 살께요. 선생님 말씀대로만 살면 다 풀릴 것 같아요. 말씀대로 좋은 대학 가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여기서 일도 하구요. 그럼 문제도 없고 행복할 것 같아요. 저 열심히 할게요. 잘 지켜봐 주세요. 그래서 선생님처럼 멋지게 살래요.”


나는 좀 황당했다. 이 어린애가 뭐라고 말하는 거지 싶었다.


“내가 멋지다고?”


“네! 젊으신데 원장님이시잖아요. 저 같은 학생도 거둬주시고요. 서울대 안 나오셨지만 경력도 화려하시고요. 강의도 엄청 잘 하시고요.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이 하는 말 들었는데요. 학원 시스템도 굉장히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하시려고 하셔서 좋다고, 다른 학원이랑 많이 다르다고 하시더라구요.”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어... 그래 고맙다. 아무튼 더 늦기 전에 들어가고, 내일도 계획대로 공부 열심히 해.”


“네, 안녕히 계세요.”


윤서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갔다. 윤서가 나가고 나는 커피를 한잔 타서 마셨다. 일이 손에 안 잡혀서, 책상을 정리하고 학원 문을 닫았다.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낮에는 더웠는데 늦은 밤이라 서늘했다.


얼마 만에 들은 칭찬인지 몰랐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한동안 잘 되는 일도 없었고, 내가 아무것도 없는 녀석인 것 같아서 쫄아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내가 엄청나게 대단한 실력 있는 유망한 강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강사들, 직원들도 학원이 좋으니까. 내가 만든 학원이 좋으니까 출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창수도 날 믿고 내 실력을 높이 샀기에 그 큰 돈을 맡긴 것이다. 난 생각보다 실력 있는 괜찮은 놈일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엔 31살에 대형학원 원장이고, 본인도 못 나온 서울대를 몇 명이나 보낸 능력 있는 강사고, 학부모들이 상담하고 가면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믿을 수 있는 입시분석가였다.


오윤서 같은 학생은 내가 롤 모델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비록 지금은 반지하 원룸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스무 살부터 남자 혼자 학교 다니고, 일하고 군대 다녀오고 2천 만원이라도 모아논 것은 칭찬받을 만한 수준 아닌가?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막 자신감이 솟구쳤다.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진짜로, 이 학원에서 서울대 수십 명 보내고, 강사로서 최고로 대우도 받고, 돈도 많이 벌어서 부자도 되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걷고 싶었다. 이 기운을 잊지 않고 온 몸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갑자기 민영이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나 지금 길을 걷고 있다고, 잘 해나가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좀 더 확실해지면 그때 연락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이그나이트입니다. 한 동안 연재를 쉬어서 죄송합니다.

길게 변명하고 싶은데, 염치가 없어서 죄송한다는 말밖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앞으로는 매주 수요일, 목요일 연재를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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