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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Sep 14. 2016

[소설] 58. 끝이 없는 이야기

Chapter 2. 내가 지금 바라보는 곳은 (1)

“부장님, 그럼 출산휴가는 언제예요?”


김 부장님은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예정일이 다음 달 말일이라, 다음 달 중순까지 일할 거야.’라고 말했다.


“어휴, 괜찮으세요? 힘들지 않아요?”


나는 ‘부장님 나이도 있는데.’라는 말을 삼켰다. 김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다행히 내가 건강체질이고, 대표님이 자상하게 많이 배려도 해주시고, 일도 익숙해서 많이 힘들지 않아. 끝까지 일해야, 애 낳고 하루라도 더 쉬어야지.”


“그럼 출산휴가는 언제까지신데요?”


“법적으로는 3개월이지, 이어서 육아 휴직을 쓸까 고민이야. 대표님께서 다행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셔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어.”


“뭐가 고마워요. 법이 그런 걸.”


“민영회계사님이 몰라서 그렇지,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다 챙겨주는 곳이 어디 있어요? 세상이 안 그래요. 그리고... 대표님 따님 이전에 동료니까 말하자면, 이 회사에서도 출산휴가랑 육아휴직 쓰는 직원은 지금 내가 처음이에요.”


“정말요?”


“응, 그렇다니까. 뭐...... 대표님이 그런 거를 막았다기보다, 여자 직원이 오래 근무하는 경우 자체가 별로 없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크긴 해요. 대표님은 원래 다 좋게 품어주는 분이시니까. 암튼 결과적으로 이렇게 출산휴가, 육아휴직 다 쓸 수 있도록 편하게 생각하도록 해주는 회사도 없고, 대표님께 참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만큼 김부장님 고생하셨잖아요. 15년 근속이 말이 15년이지. 나는 벌서 한 번 이직했고, 또 이직할 생각 하는 걸요.”


“그건 쫌 나도 자랑스럽긴 해. 하하 그런데 정말로 대표님이 좋아서 이렇게 된 거지. 민영 회계사님은 좋은 아빠 뒀어요. 자랑스러워해도 돼.”


“아이고, 닭살이야.”


나는 팔을 긁는 척하며 웃었다.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겠다던 김부장님은 결국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인공수정을 거쳐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결혼은 안 하겠다던 부장님이 결혼을 한 것도 의아했지만, 신혼 몇 년 겪지도 않고 임신을 원하더니, 인공수정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참 세상모를 일이다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이회계사님이랑, 승민씨는 잘 지내나요? 승민씨는 회사 그만두고 이제 연락 안 하지요?”


“이회계사님은 이번에 아이가 영재반 들어갔대. 그 정도로 똑똑하니까 뒷바라지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회계사님 요즘 재테크 책 보면서 무슨 공부하느라 정신없어요. 그걸 본 대표님은 아들도 회계사 시켜서, 우리 회사에 입사시켜, 자격증 시험 본다면 내가 장학금 줄게, 이러시고. 대표님은 회계사가 최고이시니까. 이회계사님은 또 그 말에 아이가 이과인지 문과인지 고민하고. 하하하. 아무튼 아이가 똑똑하니 얼마나 좋아. 요새 얼굴이 활짝 피셨어. 그리고 승민씨는 음......”


“왜요?”


“승민씨는 내 결혼식에서 보고 어쩌다 보니 만나지 못했어. 근데 몇 달 전에 애기 돌이라고 문자가 왔더라고. 돌잔치 오라고...... 정말 고민했는데. 그냥 안 갔어. 기프티콘 하나 보내고. 뭐랄까 경조사 동원 인맥 같잖아. 사회생활하다 보면 그럴 수 있긴 한데, 뭐...... 그냥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어. 이젠 아마 연락 안 될 것 같아.”


“아...... 승민씨 쫌 그런 면이 있긴 했지요. 근데 승민씨 내 성격 안다. 나 같으면 문자 씹었을 텐데, 다행히 나한테는 문자도 안 했네요.”


“그러니까, 사람 봐가면서 찔러보나 싶어서 내가 더 쫌 그랬어. 뭐, 어차피 여기까지니까. 좋게 좋게 잊고 있어야지. 또 그러다가 우연히 보면, 반가운 척하고 그러는 거고.”


“하하하, 맞아요. 길가다가 만나면 반가운 척, 연락처 주고 받고. 어쩜 맞아 맞아 하하하.”


우리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김부장님이 새로운 이슈를 꺼냈다.


“근데, 민영씨는 뭐 새로운 소식 없어?”


“나야, 뭐...... 수험생이 뭐가 있겠어요. 회사, 학원, 집. 이거예요. 가끔 운동이나 하고. 생활이 똑같아서 지겨워요.”


“그래도 대단해.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거잖아. 멋져요.”


“무슨, 도전까지는... 그냥 심심하니까 이왕이면 돈 버는 거에 도움되는 취미를 할 뿐이에요.”


“이야!!! 진짜 멋진 말이다. 취미로 공부하고, 시험 보고. 여유가 넘치는 구만. 부러워요. 난 이제 앞날이 정해졌잖아. 도전은......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꿈도 못 꾸고. 이제 나는 아줌마로 늙을 일만 남았는걸. 그렇게 늦게 결혼했어도, 가끔은 발전이 없어지는 내가 답답하고 속상하거든. 부러워. 정말 부러워. 결혼하기 전에 정말 원 없이 하고 싶은 것 다해야 해요. 시험도 붙고, 대표님 욕심대로 로스쿨도 한 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고. 나는 막 자기 통해서 대리 만족하는 것 같아. 하하하”


“에이 왜 그러세요. 시험공부를 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직장과 집의 연속인 걸요. 딱히 발전 같은 생각은 안 들어요. 오히려 더 회계사가 공고히 되니까. 그냥 이렇게 정해졌구나 싶고. 성취감 같은 것도 이젠 별로 없어요. 오히려 부장님이 애기 낳고 나면 신세계가 펼쳐지는 거 아니에요? 진짜 새로운 도전이고,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는 거잖아요. 부장님이야 말로 도전하고, 발전해나가는 거지요.”


“모르던 세계가 펼쳐지겠지. 힘들고, 힘들겠지. 후후. 나는 없어지고 아이만 남는 삶이래. 마흔 되도록 딱히 나로서 살아본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젠 엄마로만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좀 답답하지 뭐. 자기 같이 싱글이면 막 발전적으로 자기 계발할 텐데, 이젠 묶여서 아무것도 못할 거를 생각하면 엄청 답답하지.”


“그래도 결혼은 좋지 않아요?”


“호호, 좋긴 좋아요. 경제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 또 당장 애 낳고, 맞벌이할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솔직히 좋아요. 내 편이 있고, 반대로 누군가가 진짜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좋아요. 그냥 나란 존재를 원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더라구요.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는 게, 순리대로 살라고 하잖아요. 맞아, 순리대로 사는 것 그게 정답인 것 같아. 그런 거 생각하면 또 자기도 결혼하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노력하고 마음먹으면 자기도 결혼할 수 있으니까.”


나는 ‘네, 그럼요. 좋겠지요. 보기 좋아요. 그런데 나는 아직 결심도 안됐지만, 결심한다고 해서 인연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어쩌겠나요.’ 하는 속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내가 주책이지? 진짜 아줌마가 되나 봐. 결혼이 뭐 별거라고 갑자기 잘난 척 한 것 같아.”


“아니에요. 내가 김부장님 진심을 왜 몰라요. 걱정 마세요. 편하게 대해요. 난 김부장님 진짜 언니로 생각하는데, 김부장님 자꾸 아빠 생각하면서 거리두면 나 속상해요.”


“정말?”


“그럼요.”


“고마워. 사실 직장 생활 20년 하면서, 직장 동료랑 친구 되는 게 진짜 힘들더라구. 그런데 자기랑, 이회계사님이 20년 만에 만든 사회 친구거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자기도 이렇게 말해주니까 참 고마워. 나이는 어려도, 민영 회계사님 본성이 선하고, 진중한 거를 알아서 나도 자꾸 생각나거든.”


“호호호, 이런 칭찬은 우리 아빠한테 꼭 한 번 해주기. 하하하.”


우리는 또 깔깔깔 웃었다.


만삭의 김부장님을 집까지 태워주고, 나는 천천히 한강을 따라 달리다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라 생수를 한 통 사서 맥주 대신 홀짝이며, 초봄의 한강을 바라보았다.


순리대로...... 순리라는 것이 사실 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환하게 웃는 김부장님의 얼굴을 보니, 순리의 길을 걷는 자의 여유와 만족감이란 것이 좋은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나의 순리는, 나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고3 때, 어느 대학을 가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에 대한 고민처럼 선택지가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길은 갈래길이 아니라, 텅 빈 광장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 같아서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어디로 가면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맞는 말인지. 30년을 넘게 살아온 지금에서야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웃기기도 했다.


아...... 만약 내가 일찍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았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할 시간도 없이 돈을 모을 생각만 하며, 주말에 애들이랑 뭐 하나만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구나. 그렇기에 결혼하면 고민도 단순하고 사는 게 편하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마시던 생수 뚜껑을 닫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10년이 된 차도 잘 굴러가고 있다. 유지비가 들어서 그렇지.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거면 됐지 머.


집에 가서 청소하고, 공부하기로 하고 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다음 소설은 다음 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내일, 목요일은 추석 연휴로 인해 하루 쉬게 되었습니다.
명절에 상관없이 해야 하는데, 게다가 마지막 몇 회를 남겨두고 쉬게 되어 아쉽고,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들 행복한 명절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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