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지금 뭐해?
민영이는 마지막 그릇인 컵을 씻어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행주를 꼭 짜서 싱크대의 물기를 꼼꼼히 닦았다. 닦은 행주는 락스를 푼 물에 담가 세탁기 앞에 놓았다.
세탁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민영이는 뒤를 돌아 그 사이 물기가 빠진 그릇들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민영이는 집을 둘러보았다. 소파도 텔레비전도 책장도 서랍 속 스카치테이프까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민영이는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소파 앞 테이블에 앉았다. 스케줄표와 볼펜을 꺼냈다.
아침 수영, 서점에서 책 구매, 미용실에서 커트, 점심은 샐러드, 화장실 청소 및 빨래 돌리기 등 집안 청소 각각의 항목을 하나하나 줄을 그었다.
모든 항목이 지워졌다.
민영이는 가뿐한 기지개를 켜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계획대로 잘 생활하고 있는 본인에게 상을 주는 것만 남았다.
‘이제 드라마나 실컷 보면서, 저녁은 배달시켜 먹고 자야지.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 내일은 기분 좋은 월요일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민영이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서 미국 드라마를 플레이시키고, 달달한 캔커피를 땄다.
살인마인 주인공이 칼을 빼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전화번호를 찬찬히 보던 민영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름이 없어도, 몇 년 동안 연락한 적 없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잊어버린 번호인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던 번호였다.
바로 현욱이었다.
노트북에 플레이되던 미국 드라마를 정지시키고,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민영이 전화 맞나요?”
“응, 나 맞아. 오빠 맞지? 오랜만이야.”
“어! 내 번호 알고 있구나. 하하. 너도 번호 그대로고 다행이다. 진짜 오랜만이야.”
“그러게. 잘 지냈어?”
“어. 나는 잘 지냈지. 아 참! 통화 괜찮아? 내가 뭐 방해하는 거 아냐?”
“괜찮아.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반갑네. 별일 없고?”
“별일은 없고, 그냥 그렇게 일하고 지내지. 아! 나 창수랑 이제 일 안 해.”
“그래? 그랬구나. 몰랐어. 창수 오빠랑 뭔 일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불편해서, 사업장 안정화시키고, 독립했지.”
“그렇구나. 그럼 지금은 다른 학원에서 일해?”
“아니. 나 학원 차렸어. 그동안 모은 거 다 털고, 대출도 조금 받고 해서. 월요일에 오픈이야.”
“어머 정말? 축하해. 드디어 원장님 됐네. 입시학원?”
“초등부터 고등까지 논술학원이야. 사실은 내일 정식 개원해. 첫 수업하는 날이야.”
“오호, 축하해. 요즘 논술 잘 된다며, 대박 날 거야. 오빠는 잘 하니까.”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나 오빠 학원 하는 거 완전 찬성했잖아. 오랫동안 잘 가르쳤고 결과도 좋았잖아. 오빠 자체가 맨땅에서 공부한 사람이고, 난 항상 오빠가 학원 하면 잘 할 거라고 생각했어.”
“난...... 난 사실 니가 날 못 믿는 줄 알았는데.”
“왜? 학원 차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난 잘 될 거라 믿었으니까 학원 차리라고 한 건데. 대신 무조건 크게 하거나, 동업하는 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랬구나...... 고마워. 난 몰랐어... 정말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
“......”
“넌 계속 아빠 회사 다녀?”
“아니. 나 아빠 회사도 나오고, 집에서도 나왔어. 이제 자취하면서 다른 회사 다녀.”
“진짜? 왜?”
“그냥, 아빠 회사에 있으니까, 처음엔 편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래서는 발전이 없겠더라고. 그리고 엄마랑도 자꾸 부딪히고 그래서. 서른 넘었으니까. 이제 어른이 돼야지 않겠어? 게다가 아빠가 회사 물려받으라고 하는데, 이래서는 못 물려받겠더라고. 정말 능력을 만들어야 물려받지 싶었어.”
“이야. 진짜 안 믿긴다. 니가 부모님께 독립을 말하다니. 내가 생각하던 니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니가 서른이야?”
“이제 서른둘! 흐흐흐. 오빠가 서른 넷이지?”
“맞네, 내가 서른 넷이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스물둘에 널 만났으니 처음 만난 지 10년도 넘었구나. 사실 나는 민영이 하면, 긴 머리 하나로 묶고, 청바지에 흰색 셔츠 입고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데. 니가 서른이 넘었구나.”
“서른둘! 그리고 그때 이후로 머리 기른 적도 없는데 맨날 긴 머리만 말하냐. 단발머리도 예쁘지 않아? 사실 오빠 만나면서 처음 반년 정도만 긴 머리였고, 그 후로는 계속 짧은 머리였는데., 하여튼 남자들 긴 머리 타령은 쳇!”
“단발도 예뻤지, 다 예뻤어. 너야 예쁘지. 지금도 머리 짧아?”
“지금은 긴 단발이야.”
“길면 길고, 단발이면 단발이지, 긴 단발은 뭐야.”
“음... 어깨랑 귀 사이? 암튼 단발이야 단발.”
“하하하하. 궁금하네 긴 단발 눈으로 안 보면 모르겠는 걸.”
“호호 뭐야.”
“참 나 어제 여행 갔어.”
“여행? 어디?”
“무진이라고. 알아?”
“무진? 아니 몰라. 거기가 어디야?”
“경남 어딘데. 작은 시골 동네야. 사실 뭐 준비하고 간 건 아니고, 학원 개원 전에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에 터미널 가서 아무 표나 끊은 거야. 매표서 가서 지금 출발하는 거 주세요. 해서 그래서 간 거야.”
“그래? 영화 같다. 오빠가 그런 면이 있었네. 어때 좋았어? 영화 보면 그런 여행 하면 로맨스가 생기거나, 스파이를 만나던지 하잖아. 하하하”
“뭐야. 정말 영화 찍냐. 하하하
그냥 아무 일도 없었어. 이름 없는 시골이니까 볼 것도 없어서 반나절만에 도로 올라왔어. 여행이라고 하기도 민망해.
근데 가서 너랑 여행 갔던 거 생각이 나더라고. 그때 기억나? 양양 갔던 거. 5일장 보고....”
“그럼, 기억나지. 재밌었잖아. 나도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이야. 즐거웠어.”
“맞아. 정말 재밌었어. 혼자서 심심하니까. 그때 생각만 주구장창 하다가 온 것 같아. 사실 그래서 생각도 났고.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쪼끔 여유가 생긴다 싶으니까 바로 또 생각이 난 건지......”
“...... 고마워, 생각해줘서.”
“...... 지금 일요일인데 뭐해?”
“나? 빨래하고, 미드보고 있었어. 일요일엔 역시 미드지.”
“여전하구나. 하하. 미드 보면서 맥주 마시는 거.”
“그치. 주말엔 이만한 게 없지. 이따가 피자 시키려고.”
“맞아, 나도 드라마 보면서 피자 먹고 싶다.”
“...... 어, 그래......”
“어이쿠 지금 보니까 너무 늦었구나. 내일 개원이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거든.”
“그래, 나도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그래...... 또 전화할게.”
“응, 그래요.”
민영이는 전화를 끊었다.
미드 동영상을 재생했다가 금방 다시 정지시켰다. 화장대로 가서 맨 밑 서랍을 열었다.
반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현욱이가 줬던 반지였다. 손가락에 한 번 끼워봤다. 딱 맞았다.
세탁기가 빨래를 끝냈다고 삑삑거렸다. 민영이는 반지를 빼서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빨랫감을 들고 건조대 앞에서 섰다. 셔츠 등 옷들은 바로 걷어 옷장에 걸 수 있게 옷걸이에 착착 걸어 말리고, 작은 속옷 등은 건조대에 바로 널었다.
빨래를 다 널고, 빨래 바구니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다시 한번 집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집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민영이는 다시 미드를 틀었다. 캔커피가 미지근해서 덜 달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전화가 왔다. 현욱이었다.
“여보세요. 오빠?”
“응, 나야.”
“뭐야, 홍홍 방금 끊어놓고.”
“그러게, 아무래도 심심해서. 우리 만나서 가볍게 맥주 한 잔 하자. 나 많이 심심해. 놀아주라. 너도 심심하잖아.”
“그건 그런데......”
“그러지 말고, 나와서 피자에 맥주 한잔 어때?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것도 좋지만, 간만에 오랜 친구랑 편하게 한잔도 좋잖아. 조용한 곳을 찾을게.”
“그래도......”
“그리고 긴 단발이 뭔지 내가 봐야겠어. 단발도 아니고, 긴 머리도 아니고 긴 단발이 뭔지 말이야.”
“......후후, 알았어. 피자에 맥주 좋아. 어디서 볼까?”
“너 집이 어디야?”
“나는 청담동.”
“그래, 내가 거기로 갈게. 3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래.”
전화를 끊은 민영이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로션, 선크림, 비비크림, 파우더, 눈썹 정리, 아이라이너, 투명 마스카라. 볼터치, 입술 틴트를 바르고, 머리를 휙휙 말리고, 고대로 머리 끝을 정리했다.
20분이 지나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옷장문을 열어 티셔츠와 가디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귀엽고 화사한 프린트의 면티셔츠를 입을지,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니트 티셔츠를 입을지 고민했다.
카톡! 알람음이 왔다.
[이 주소로 와. 조용하고 맛도 있데. 피자랑 수제 맥주란다. 나는 지금부터 20분쯤 걸릴 거 같아. 천천히 와.]
현욱이가 피자집 주소를 링크로 보낸 것이었다.
민영이는 [ㅇㅋ]라고 답문을 보내고, 다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민영이는 결국 깨끗한 누드톤의 니트 상의에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핸드백에 지갑과 휴대폰을 넣고, 플랫 슈즈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갔을 때, 현욱이는 이미 도착했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문자를 보낸 상태였다.
가게는 미국식 호프집 같은 분위기였지만, 사람이 적고, 음악 소리가 낮아서 그런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민영이는 가게 입구에서 금방 현욱을 찾을 수 있었다. 현욱은 콜라 한 잔을 앞에 두고,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 소매를 접은 체크 남방으로 책을 보는 것처럼 열심히 메뉴판을 보는 현욱의 옆모습에 유난히 코가 오똑해 보였다.
민영은 천천히 현욱에게 갔다.
“왔네.”
현욱이 고개를 들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응, 오빠는 일찍 왔네.”
민영이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