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그나이트 Sep 22. 2016

[소설] 60. 끝이 없는 이야기

Chapter 3. 지금 뭐해? (2)

민영은 천천히 현욱에게 갔다.


“왔어.”


현욱이 고개를 들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응, 일찍 왔네.”


민영이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먼저 메뉴판을 봤는데, 수제 모둠 맥주랑, 피자는 2가지 맛이 들어있는 반반 피자가 있더라고. 이거 시키면 어떨까?”


“좋아.”


현욱이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갔다. 둘이 눈을 마주쳤다. 현욱이가 씩 웃었다. 민영이도 씩 웃었다.


“그게 긴 단발이구나.”


“응, 일명 거지존이라고 해.”


“거지 존?”


“응, 관리하기 어렵다고.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으면서 삐치거든 그래서 단발 거지존이라고 해.”


“근데 하나도 안 삐쳤는데, 예쁜데.”


“으흥, 드라이했지.”


“암튼 하나 배웠다. 커트, 단발, 거지존 단발. 긴 머리. 이렇게 간다는 거지?”


“응, 호호.”


종업원이 맥주를 먼저 가져왔다.


작은 컵 6개에 색이 다른 맥주들이 담겨 있었다.


“맛이 약한 순부터 즐기셔야 맛이 나거든요. 1번부터 차례대로 드시는 것을 추천하겠습니다.”


종업원이 갔다.


“이제 수제 맥주구나. 무슨 와인 같다. 마시는 순서까지 있고.”


“응, 요새는 이런 게 유행이더라고. 일단 맛보고 이 중에 제일 맛난 거 큰 잔으로 시키던지 하자. 나는 맥주는 홀짝 대는 거 별로야. 꿀꺽꿀꺽 마셔야 맥주답지. 안 그래?”


“여전하구나, 정말.”


“헤헤, 그렇지 머.”


“그럼 빨리 마시고, 큰 거 시켜. 뭐부터 마실 거야?”


“잔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반씩 마시자. 일단 시음은 해야 하니까.”


“그래, 여기요! 잔 하나 더 주세요.”


현욱은 잔을 받아 1번 맥주를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따르려고 폼은 잡는데, 쏟을 까 봐 쉽게 맥주를 반으로 나누지 못했다.


민영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줘봐. 내가 해볼게.”


자신 있게 손을 내민 민영에게 현욱이가 잔을 건넸다.


민영이는 한 번에 휙 맥주를 따랐다.


그런데 아이쿠야!! 맥주가 테이블에 쏟아졌다.


“아이고.”


민영이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혓바닥을 메롱 내밀었다.


“뭐야! 잘 하는 것처럼 가져가 놓고. 아이고 아까워라.”


“쳇! 쉬워 보였는데.”


“하하하하”


현욱이가 냅킨으로 테이블을 닦으며 웃었다. 민영이고 헤헤헤 하고 따라 웃었다.


“그냥 네가 다 먼저 맛봐. 남긴 거 내가 먹을게.”


“그럴까?”


“그래, 잔에 따르다가 다 버리겠다. 한 컵 돌려 먹으면 뭐 어때. 우리가 내외하는 사이도 아닌데.”


“하하하. 그럼 일단 이건 내가 다 마실께. 한 입 남았네. 헤헤헤.”


민영이가 조금 남은 1번 맥주를 한 입에 마셨다.


현욱이가 테이블을 마저 치우며 오빠 미소를 지었다. 민영이도 맥주를 삼키며 테이블을 정리하는 현욱이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은이랑 창수 오빠는 잘 지내?”


“잘 지내겠지. 요새는 바빠서 연락을 못했네.”


“아. 맞다. 창수 오빠랑 갈라선 거야? 무슨 일 있던 거야? 궁금해.”


“공식적으로는 좋게 헤어졌어. 내가 독립하고 싶다고 했거든, 창수도 퇴직금도 챙겨줬고.”


“공식적으로?”


“남자 여자 헤어지는 것처럼, 동업자가 헤어진 거도 결국은 마음 떠나, 믿음 떠나 섭섭해서 헤어지는 건데. 당연히 아름다운 이별이 어딨어. 그래도. 다음에 혹시 모를 동업의 여지는 남겨둘 정도로, 감정싸움은 안 했다는 거야. 그리고 나야 반 동업이라고 생각했지만, 창수는 그냥 직원 하나 나간 거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구나. 하긴 아무리 오빠랑 창수 오빠가 절친이라고 해도. 친구끼리 동업은 쉽지 않겠지.”


“아무래도 자꾸 충돌이 있었어. 창수는 학원이 잘 된다 싶으니까 돈으로 학생을 보기 시작하고. 나는 그래도 학생인데 돈으로만 볼 수가 없었어. 특히 입시 시즌에. 논술로 대학 보내겠다면서, 떨어질 게 뻔한 학생들 데려다가 1시간에 15만 원짜리 특강을 하루에 3개씩 줄줄이 듣게 할 때면 답답하더라고.


그 애들은 그 시간에 수능 공부를 더 하던지. 아님 낮은 학교 면접을 준비시켜야 하는데, 상담실에서 무조건 특강 들으라고 학부모들 설득시켜 놓는 거야. 그런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업할 때면 정말 속이 답답하더라고.     

그래도 학생들이 많으니까, 그중에서 서울대 몇 명 보내고 하니 입소문은 더 나고. 더더욱 들러리밖에 안 되는 애들은 쭉쭉 들어오고......


뭐, 결국은 창수한테 정말 독립하고 싶다고 말하고 나왔지. 아마 상담 실장은 엄청 좋았을 거야. 사실 상담 실장이 보통이 아니거든.”


“상담 실장?”


“응, 말발 좋고 10년 경력인 여자인데. 내가 상담 쪽이 약하니까 신경 써서 수소문하고 면접 봐서 뽑은 사람이거든. 그런데 정말 잘해. 잘하는데... 정말 장사꾼이야. 사실 창수도 그 여자한테 넘어간 거야. 그 여자 바로 실세를 알아보고는 내가 허락 안 해주는 거는 다이렉트로 창수한테 가서 조르고 허락받고 하더라고.


아무튼 그 여자가 계속 이렇게 저렇게 학원으로 돈 버는 방법을 창수한테 말해주니까. 창수가 넘어간 거거든. 나 붙잡다가 만 것도, 그 여자가 있으니까. 그 여자 믿고 나를 보내준 거지. 그 여자는 지금 자기 마음대로 학원 운영하면서 아주 신나 하고 있을 거야.”


“오빠가 파벌에 밀린 거네. 그 작은 학원에, 친구랑 하는 학원에서조차 정치에 밀리다니. 에이그 쯧쯧쯧.”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친구를 사장으로 인정 못하고, 마치 내 학원 인양 마음 주고 일했던 내가 바보인 것일 수도 있고. 후후후.”


“바보 맞는구먼. 월급이 그냥 월급이 아닌데, 혼자 꿈꾸고 있으면 어떡해. 상담 실장이 똑똑한 거야. 오빠가 일하는 데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잖아.”


“맞아. 니 말이 맞아.”


현욱은 피자를 한 입 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민영은 피식 웃었다.


“근데 어차피 대형 학원이 다 그렇지 뭐. 어디를 가던, 어떻게 하던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오빠 학원은 잘 될 거야. 대형 학원도 아니고, 동네 학원이면, 오빠의 지금 주관만 안 흔들리면, 안정적으로 오래 할 수 있을 거야. 학생들도 좋아할 거고. 큰돈은 못 벌어도, 살만할 거야. 오빠가 더 잘 알겠지만. 우리한테는 그런 게 어울려, 큰돈 벌고 하는 건 지은이네나 어울리고. 그게 사람마다 다른 길을 걷는 거지.”


“니 말이 맞아. 나도 이제 욕심은 별로 없어. 오래 운영할 수 있는 학원이면 돼. 혼자서 돈 쓸 일도 없고. 한 10년 일해서 작은 집 하나 사고, 30년 뒤에는 연금이랑, 월세랑, 서점 주인 할 정도면 돼.”


“서점? 웬 서점? 오빠 서점 차리고 싶었어?”


“뭐 학원 강사를 100살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60까지 할 수 있으면 대박이지 않을까. 주변에 50대 강사님까지는 봤으니까. 그런데 100세 시대라니까 60대쯤에 학원에서 퇴출당하면 서점 하고 싶더라고. 한 달에 100만 원 벌면서, 실컷 책 읽을 수 있는 북카페 같은 거 하면 좋겠지 싶어서.”


“우와, 오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엄청 계획적이고, 뭔가 있어 보인다. 후후.”


“그래? 우하하하 그동안 내가 좀 컸지?”


“그러게, 뭐랄까 철이 들었달까. 가공이 되었달까? 가공 안된 돌 같은 원석이 좀 다듬어져서 멋져진 것 같아. 되게 현실적인 거 같고.


남자 같고.”


순간 민영이는 뭔가 엄청 아슬아슬한 대사를 한 것 같아 얼굴이 굳었다. 현욱이는 그런 민영의 표정을 바로 눈치채고 오버하며 말을 받았다.


“와인같이 성숙해진 남자 같은? 하긴 남자는 서른부터라고는 하더라 푸하하하하.”


현욱이가 농담으로 받아쳐주자, 민영이도 일부러 거친 농담으로 대꾸했다.


“뭐래. 좀 띠워주니까 바로 좋아하기는, 립서비스도 못 받아본 찌질이처럼. 그렇게 신나? 칭찬해주니까? 우쭈쭈쭈.”


둘 다 남은 맥주 한잔씩을 들고 마셨다. 민영이는 중심을 잡아준 현욱이가 고마웠다.


남자 같다 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남자 같다는 뜻이었지, 어떤 느낌이 있는 대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욱이가 오해했다면, 그래서 둘만의 동창회가, 연인의 재회가 되어버렸다면, 엄청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욱은 선을 지켜주었다. 민영이는 마음이 푹 놓였다. 그리고 진짜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가식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유일한 친구, 여자로서 시기 질투도 하지 않을 사람 친구, 추억을 공유하고, 내가 잘못된 길을 가거나, 안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냉정하게 독설을 해줄 수 도 있는 친구. 현욱 오빠가 바로 그런 친구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헤어진 연인이랑 친구가 되면 좋다는 거구나.’라고 민영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 아까 미국 회계사 시험 준비한다는 건 뭐야? 미국 가려는 거야?”


“응?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이력서에 자격증 하나 더 넣으려는 것뿐이야.”


“아...... 난 또 미국 가는가 했어.”


“사실 어떻게 보면 딱히 쓸모가 없어. 한국에서 일할 거면 미국 회계사가 그다지 필요 없거든. 그래도 외국계 기업이나, 해외랑 거래하는 글로벌 기업 같은데 일 할 때 도움이 되긴 하겠지. 처음에는 엄청 대단한 자격증 준비하는 것 같아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그냥저냥 쉬엄쉬엄 하는 거야. 붙으면 좋고, 떨어져도 어쩔 수 없고. 취미 같다고 할까? 워낙에 회사, 집만 오가는 생활에 딱히 자극이 되는 게 없으니까 뭐라도 하는 거지.”


“그래도 멋진데, 보기 좋고, 아! 맞다. 완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골드미스잖아? 뭐 하나 부족함 없는 화려하고 멋진 싱글 라이프. 이야. 주민영 성공했네.”


“푸하하하. 정말? 나 성공했어?”


“그럼, 돈에 구애 안 받아. 전문직이야. 예쁘고, 취미로 공부까지 하는 지적 탐구까지 이거야 뭐 여대생 롤 모델이잖아.”


“우와. 오랜만이네 정말. 이렇게 칭찬받는 거. 사실 서른 넘으면서 계속 결혼 재촉에 구박받아서, 좀 쭈그러졌었거든,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었고. 기분 좋다. 정말. 내가 골드미스라니!!! 내가 막 김혜수 같긴 하지. 하하하하.”


“거봐!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지?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칭찬에 목말랐었구나. 그동안 칭찬해줄 사람이 서로밖에 없었다니 눈물 난다. 정말. 자주 만나야겠는 걸.”


“그러게, 후후후. 그러고 보니 서로 예쁘다고 빈말로 칭찬해주는 아줌마들 동창회 같아 크크크크.”


“그렇게 되나? 근데 아줌마들 이해가 가는데, 칭찬 기브 앤 테이크 이거 정말 좋은 문화네. 엄청 기분 좋아.”


“하하하하.”


현욱이는 환하게 웃는 민영이를 보며, 따라 웃었다. 이가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는 민영이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몇 년 만에 전화하고, 바로 만나서 이렇게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민영이는 마치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던 것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있었다. 처음 반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59. 끝이 없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