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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May 22. 2022

사랑하는 그대, 치킨

아아, 도저히 떨쳐내지 못하는 그것은 사랑의 맛


세상엔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개성적이기까지 해서 후각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놓치지 못할 향기들이 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의 네 샴푸 향기, 이른 아침 주방 구석 포트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원두커피 냄새, 화창한 날에 널어둔 이불에 배인 따스한 햇빛의 온기, 페이스트리 잘하는 베이커리의 고소한 버터 향기. 그리고 바삭한 옷을 입기 위해 자르르르 끓어오르는 기름에서 뜨거움을 견뎌내는, 군침도는 치킨의 열기.


아, 치킨 먹고 싶다.



통닭 말고 치킨


치킨. Chicken은 구글 검색창에 검색하면 '한국 음식'이라는 태그가 붙어 나온다. 이 튀김옷을 입혀 튀겨냈을 뿐인 닭고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유별난 열정과 사랑은, 영어 이름을 가진 이 음식을 닭튀김과 비슷하지만 분명히 차별되는 무언가로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기껏 바삭바삭해진 그것에 온갖 소스를 뿌려 버무리고 덖고 졸이는 것으로 모자라 다시 무언가 토핑과 가루까지 뿌려 기어코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민족이 또 어디 있으랴. 한 가지 식재료를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새로운 맛을 찾아내는 건 대개 파인다이닝 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치킨이 한국 음식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젠 좀 억울할 지경. 보통의 후라이드부터 양념, 간장, 마늘, 마늘간장, 잭다니엘, 와사비마요, 투움바, 치즈, 뿌링클...... 눈이 가는 치킨 메뉴라면 한 번 정도는 꼭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단연코 한식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가만 생각해보면 '치킨'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게 된 건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얼추 20여 년 전이다. IMF 사태로 은행과 회사들이 줄도산하고, 대기업 임원 하시던 분들이 퇴직해 동네에 배달 전문 치킨집을 수도 없이 개업하면서, 논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우리 빌라에도 치킨 배달 문명이 전해졌으니. 그 이전까진 아버지가 가끔 시장통에서 사들고 오던, 기름종이를 반투명하게 물들여오던 '통닭'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통닭이 맛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좋아한다. 다리든 날개든 가슴살이든 원하는 대로 죽죽 찢어서 우적우적 먹는 야만스러운 재미는 물론이고, 기름종이 봉투 한편에 들어가 있는 맛소금에 콕콕 찍어서 먹으면 행복한 맛이 난다. 가마솥 따위에 잘 튀겨낸 통닭이라면, 기름이 모락모락 올라올 때엔 '뻑살'마저도 제법 촉촉한 식감이 있기 때문에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면 즐겁게 한 마리 꿀꺽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크리스피'라는, 바삭함의 신기원을 연 튀김옷을 입은 치킨을 만난 다음에는 다신 통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빨 사이에서 바스러지는 튀김옷의 쾌감, 육즙 가득한 살코기에 은은하게 배인 절묘한 스파이스, 내 취향에 맞는 소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 아름다움이란. 심혼을 뒤흔드는 매력을 만난 다음에는 그 이전에 내가 사랑하던 것이 어떠했든 간에 마음속에 가진 기준치가 훌쩍 높아지고 만다. 간혹 길을 가다 전 여자 친구를 마주치면 잠시 추억에 잠길지언정 곧 지금의 그녀(없지만)의 해사한 미소를 떠올리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치맥 or 치쏘?


치킨 덕분에 의기투합한 친구가 있다. 나보다는 두 살 연상의 누나로, 167 정도 되는 키에 쭉쭉 뻗은 팔다리, 군살 없는 몸매에 시원 털털 상큼한 성격까지 가진, 지금까지의 생을 통틀어 생각해봐도 둘도 없는 미녀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을 다 갖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이성으로서의 매력보다는 사람의 친근함이 더욱 크게 다가와 이젠 누구보다 더없이 가까워진 사람. 아마 지금까지 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뜬금없이 메시지나 전화로 나와 수다를 떨어줄 것 같은 그녀와의 시작은 치킨이었다.


배고픈데 치맥이자 하자고 들어간 치킨집이었다. 하필 생맥주 세 잔을 마시면 한 잔을 공짜로 주고 있었고, 메뉴판 가운데 떡하니 박힌 치킨텐더는 누가 봐도 포크나 젓가락 대신 손으로 들고 먹어야 할 감성을 품고 있었다. 단 몇 분만에 단아한 노란 옷을 입고 테이블에 올라온 치킨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저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바삭바삭한 소리도 냈다. 텐더, 그 이름답게 그 속은 얼마나 쥬시하고 부드러웠던가. 시원한 데다 톡 쏘는 탄산을 가득 품은 생맥주가 곁에 있으니 치킨무도 다 필요 없었다. 빈 맥주잔이 순식간에 10여 잔. 우리는 치킨의 식감과 맛과 톡 쏘는 맥주와의 조화에 대해 내리 두 시간쯤을 떠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저 사회적 관계만이 있었던 두 사람이 치킨을 사이에 두자, 그야말로 치킨과 맥주처럼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특히 서로의 마음속에 끈적한 기름기가 끼어 인생의 맛을 즐기지 못할 때 시원하고 깔끔하게 씻어내준다는 점에서.



유독 치킨에 소주를 찾는 양반도 하나 있다. 가끔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인데, 일차로는 절대로 치킨을 안 먹고, 2차에 아무 호프나 찾아가서 꼭 치킨에 소주를 먹어야 심신이 안정되는 사람이다. 처음 그의 '치쏘' 예찬을 들었을 때엔 너무 뜨악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그게 무슨 말이야? 치킨엔 맥주지?" 해 버렸다. 그러나 거듭된 강권에 나도 치쏘 한 번 해봤더니 이게 의외로 말이 되는 조합이지 않은가.


치맥은 알싸한 맥주가 입 안을 개운하게 클렌징해주는 느낌이라면, 소주는 살짝 감미료를 더하는 느낌이랄까. 치맥 할 때 맥주의 역할은 '자 한 모금 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맛이 물리지 않게 하는 것이고, 소주는 '이거 마신 다음 다시 한 입 뜯어봐!'라고 다음 한 입, 다음 한 잔을 강요하는 것이다. 치쏘는 마치 단짠의 조화와도 같아서 치킨 다음엔 소주 다음엔 치킨 다음엔 소주 다음엔...... 을 지치기 전까지 반복하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치맥을 더 선호하나, 가끔 치킨을 폭식하고 싶은 날에는 치쏘의 제단에 내 위장과 뱃살을 바치게 되고 만다.



튀김옷 안 입은 치킨은 치킨인가?



어느 날 치킨계에 일종의 혁명이 불어닥쳤다. 내 입장에서는 폭동이기도 했다. 오븐에 구워 '칼로리가 적은' 치킨. 맛의 척도가 칼로리인데 튀김옷 없이 구워내서 칼로리는 줄이고, 맛은 더 좋은 치킨이라니 이게 무슨 난센스인가. 하지만 당시 체중이 80kg을 넘나들며, 살기 위해선 다이어트를 해야 하고 치킨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내게 이것은 일종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냥 닭구이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약 2주의 시간을 들여 이 치킨집의 메뉴 전단지를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눈에 띄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고, 혼신의 메소드 연기로("와.오.븐.에.구.운.치.킨.이.래.요.이.게.무.슨.맛.일.까.") 어머니의 지갑을 여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세상엔 조금 다른 종류의 바삭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은하게 간이 된 닭고기의 표면은 골든 브라운. 껍데기 끄트머리는 좀 더 진한 갈색이 날 정도로 구워져서 입 안에서 바작바작 하는 소리를 냈다. 고기의 기름기가 바깥으로 다 흘러나와 뻑뻑할 것 같지만, 살코기는 생각 이상으로 야들야들. 튀겨진 그것을 한 입 뜯어낼 때 더운 김이 확 올라오는 것과는 달리, 오븐에 구운 녀석은 안에 꽉 잠겨져 있던 육즙이 투투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냄새만 기막히고 맛에서는 늘 실망뿐이었던 전기구이 통닭과는 결이 다른 담백함이 있어서, 조금 더 자극을 원한다면 소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뿌리거나 발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맛있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이게 아니라고 웅변했다. 바작바작 말고 바삭바삭! 이건 크리스피가 아니야(쩝쩝)! 그 쾌감을 포기하고도 어찌 치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우적우적)! 구워도 이렇게 맛있는데 튀겼다면 더 맛있었을 것 아닌가(와구와구)? 거기에 탄산음료를 곁들이기 애매한 이 담백함이라니(쫍쫍). 역시 이건 치킨이라고 하기엔 지나친 외도인 것 같아....어라?


언제 다 먹었지?


그렇게 나는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부른 배와 좀 더 적은 칼로리와 패배감만을 얻었다. 후일 중국에서 다이어트 대성공을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 '칼로리가 적은 치킨' 께서는 갈비양념이며 매운 양념이며 온갖 가루며 이것저것 덧발라서 다른 치킨 못지않은 칼로리를 채우고 불후의 인기를 얻은 참이었다. 여전히 이것을 치킨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데, 칼로리가 다른 치킨과 비슷한 선에 올라오니 이게 치킨이건 말건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되었달까. 양념이 묻은 손 끝을 쪽쪽 빨아먹은 뒤 츄리닝 바지에 쓱 닦고 나면 일종의 (뱃살에 대한) 배덕감에 가까운 쾌감이 치밀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이거 별미긴 별미라니까.



 둘 다 하면 어때서 - 반반(feat.무마니)


탕짜면 이전에 이미 훌륭한 선각자들이 있었나니. 반반 치킨을 만들어낸 그 누군가는 가히 이 세계에 평화를 선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치킨에 선택지가 아직 후라이드와 양념, 두 가지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가, 둘 중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 격렬한 다툼이 있어왔다. 그러니까, 나랑 내 동생 사이에 말이다.


바삭한 식감에 더해 한 번씩 강렬한 소금기를 더해 먹는 쾌감을 사랑하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후라이드에 진심이다. 하지만 내 동생은 느슨해진 치킨 세계에 긴장감을 더해줄 수 있는 새로운 양념을 늘 찾아 헤맨다. 지금은 온갖 다양한 맛이 있어서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하니 나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선택지가 둘 뿐이던 시절에는 왜 둘 밖에 없는 닭다리에  전부 양념을 묻히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 먹으면 물리는 건 후라이드나 양념이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늘 반반 치킨이었다.


반반을 주문했을 때도 가끔은 문제가 발생했다. 나라고 양념치킨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동생도 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둘 다 닭다리를 좋아했다. 그러면 나는 후라이드 다리, 동생은 양념 다리를 먹는 것으로 평화롭게 끝날 수 있지만, 왜 그런 날도 있지 않은가? 혓바닥이 평소와는 다른 자극을 원하는 날. 이전에 잘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 오늘따라 너도 나도 양념 닭다리나 후라이드 닭다리를 원하는 순간에는 전쟁이 되는 것이었다. 칸막이 역할을 하는 은박지가 삐져나와 있는 치킨박스에 둘러진 고무줄을 제거하고 박스를 연 뒤 0.07초 이내에 내가 원하는 다리를 찾아내고 빨리 집지 않으면 동시에 치킨 한 조각을 붙잡고 눈싸움을 해야 하는 뻘쭘하지만 치열한 경험을 하고 마는 것이다. 하물며 상대가 나 못지않은 고수라면? 그 긴장감은 가히 피자 한 판 시켰을 때 가운데에 늘 뭉치는 치즈 덩어리를 노리는 두 남자의 자강두천의 상황과도 같다.


그러나 어머니가 물을 뺀 치킨무를 한가득 식탁에 툭 내려놓으면서 한 마디 하면 그 싸움은 바로 정리되었다.


"후라이드 다리 하나는 엄마 꺼."


나는 속으로 울면서 날개를 집었다. 이젠 어른이라 참 다행이다. 내가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으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치킨이 몹시 당기는 요즘이다. 한동안 못 먹은 것도 있고, 다소 소극적인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 배덕감에 가까운 쾌감이 있는 음식이 아닌가. 한 번쯤 괜찮을 거라는 건 알고 있으면서도, 저걸 먹는 순간 다 망해버린다는 불안함 역시 존재한다.


치킨집에 전화를 걸까 말까. 우리 집으로 배달오라고 할까 말까. 내 마음속 그녀에게, 부디 내 곁으로 오라고 간청하는 그 순간만큼(에이 그건 아니지 인마) 떨리는 마음이다. 아아, 이것은 혹시 사랑인가.


내게 오는 순간에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매콤 달콤한 빨간 원피스? 짭짤 달달한 새카만 블레이저? 알싸한 향을 품은 것 같은 꽃무늬? 새하얀 눈을 흩뿌린 것처럼 화사한 니트나 치즈처럼 루즈한 느낌의 노오란 카디건도 엄청 잘 어울리겠지. 만약 옷을 고르지 못하는 것 같다면 시일을 두고 내가 하나하나 사서 선물하는 것도 좋은데. 아, 이 벅찬 기분은 역시 사랑일까.


띵동-! 벨이 울리고, 인터폰을 확인한 뒤, 만면에 웃음꽃이 핀다. 감미로운 향수를 뿌린 듯, 저 복도 끝에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향기가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현관 앞에서 꼭 끌어안는다면, 그 향기가 끝에, 품 안에 깊게 배어서, 잠드는 그 순간까지도 내 곁에 머물 것이다. 실행 없이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것은 아마도 사랑이다.


만약 약속시간이 가까워질 때 갑작스럽게 취소된다면 나는 허탈함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릴 거다. 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나를 우선해주지 않아서 몹시 섭섭하고, 솔직히 화도 나겠지. 그럼 다음에 언제 다시 오느냐 하니 내일이나 가능하다는데, 내일은 내가 또 안될 것 같고. 잠시 마주치지 못하게 된 것만으로도 우울하게 하는 이것은 십중팔구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면 흩어진다. 이별이 다가온다는 것은 꽤나 쉽고 명확하게 눈치챌 수 있다. 뜨거웠던 열기가 가시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차게 식은, 열기 가득했던 조각 몇 개와 원래의 형태를 잃은 파편이나 잔해뿐.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행복한 시간이 깨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리지만 어쩔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난 자리, 곳곳에 흩어진 잔해와 행복이 가득 붙어 있었던 뼛조각을 추려내어 한데 고이 모아 정리해야 할 뿐이다. 그 아쉽고 버거운 감정마저도 온전히 간직하되, 떠난 자리는 다음을 위해 최대한 깨끗이 치워 이전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울긋불긋한 얼룩을 내버려 두면 닦아내고 세척하고 빨아보아도 꽤 오래 그 자리에 남아서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곱씹게 만들고, 다음이 또 있지 않을까 미련을 갖게 하거나 과거에 파묻혀 새로운 만남을 계속 미루도록 하기 때문이다. 깨끗이 잊고 새로이 출발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을 보니, 이건 분명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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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사랑은 아마도 지금은 이름도 생각 안 나는 중학교 때의 그 누나인 것 같다. 말씨가 나긋나긋하고, 단어 선택은 치킨무처럼 새콤달콤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진학하면서 동네 치킨집 망하듯 관계도 자연 소멸했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좋아하는 음식은 많고 많았으나, 편식이 심했던 어린 시절 나의 첫사랑은 당연히 치킨이다. 바삭하지, 짭짤하지, 고소하지, 야들야들하지, 뜨끈하지. 입안에 가득 들어차는 육중한 고기의 질감, 가끔 한 조각 먹어주면 입이 즐거웠던 양념의 맛. 내가 음식에서 사랑스러워하는 여러 요소가 가득했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그 다리에 입을 맞추고 주욱 뜯어낼 때 입에 가득 차는 이것은 분명 사랑의 맛임에 틀림없으렷다? 그렇다면......



내일은 여러 가지 맛이 나는 사랑에 둘러싸여 볼까나♥

양다리가 아니라 문어발이래도 괜찮아, 치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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