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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비주 Nov 22. 2022

가을은 가끔 버겁다



  생글거린다.

동그란 두 눈으로 목을 길게 빼고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유연한 자태를 뽐내며 우아하게 걷는다.

이 애는 왜 이리 이쁜 건지.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던지 다리에 칭칭 감기며 비빈다.

솜털 뭉치처럼 꼬리가 잘록하다.

기다란 꼬리를 갖지 못한 아이들은 길고양이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대부분 어미 모의 영양 결핍으로 태어난 애들에게서 볼 수 있다.


  마음이 아리다.

작은 꼬리를 힘껏 치켜세우며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온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제 몸을 이곳저곳 만져도 싫어하지 않고 철철 넘치는 애교에 어쩔 수 없어 자꾸 눈길과 발길이 머무른다.

또다시 내 다리를 타고 돌며 제 몸을 힘껏 밀착시킨다.

 ' 아, 이일을 어쩌나' 요즈음 들어 가장 진한 애정표현이 전신을 타고 올라온다.

갈색, 밤색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털이 윤기가 자르르한 7,8개월 정도 된 얼룩소 고양이다.

요조숙녀에 섹시함까지 갖춘 기가 막힌 미모다.

  자유로운 존재, 햇볕 아래 자신의 동선을 드러내며 한껏 우아한 자태로 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봐주세요! 예뻐해 주세요!


지긋한 눈빛이 놈의 진한 고독을 말해준다.


  몇 년 전 태국에 갔다.

그날은 비가 제법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코끼리 트레킹이란 관광코스에서 내가 탄 코끼리를 잡아끌어주던 미모의 젊은 엄마를 만났다.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왔던 그녀가 유달리 동료 남자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무언가 할 말을 눈에 잔뜩 갖고 있던 그녀에게 나는 짧은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날은 비가 제법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그녀의 첫 질문은 내게 '한국 사람이세요'였다.

자기는 세 아이의 엄마고 지금은 혼자라는 거다.

태국에 근무했던 한국 남자와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는 갑자기 한국으로 가버렸다.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살아 지금 미혼모란다.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의 연예인들도 좋아하고 요즈음 유행하는  노래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내 권유에 불렀던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노란 1회용 비옷을 입고 흔들리는 코끼리를 타고 질척거리는 트레킹 코스를 가던 나의 마음이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 돌아올 줄도 모르는 그 남자에 대한 그리움이 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그녀의 전신을 비가 두드리고 있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은 그녀의 좁은 어깨가 몹시도 서러웠다.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던 작은 위로는 미모에 대한 찬사와

스물다섯 살밖에 안됐던 그녀 앞날에 행운을 빌어 주는 일이었다.

지갑에서 꺼낸 나의 작은 지전이 그녀의 앞날을 보증하는 수표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힘들었다.


  오늘은 유달리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는 가을날이다.

새끼 고양이의 사람에 대한 갈망이 태국에서 만난 세 아이의 미혼모가 되어버린 미모의 젊은 엄마를 문득 떠올리게 했다.

  살랑거리던 고양이를 떠나 사무실로 가는 길이 몹시도 길었다.

꼬리처럼 따라붙던 놈이 순간 우리의 의중을 알았던지 쏜살같이 오던 길을 뛰어갔다.

  남편과 나는 집에 데려가면 키우는 고양이 깜이와 영역다툼이 있을 거라는 핑계 아래 그 애를 떠났다.

또 하나의 객식구를 데려다 가족을 만든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과 애정을 우물처럼 길러 올리는 일이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가을 한날  작은 생명이 못내 겨워

코스모스 마알간 길을 따라 놈의 신나는 점프를 생각해낸다.

긴 잠자리 떼가 비행을 하며 가을은 깊어만 간다.


2014.10


오래전 일이네요. 그동안 태국의 코끼리 트레킹은 동물학대로

없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 같고 고양이의 생태에 대해선 비교적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도 길냥이 둘째 짱이의 입양도 있었다. 만남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됐다.

가끔 우울한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상처로 남는다.


60일 지정생존자란 지진희 주인공인 드라마를 다시 본다.

허구의 드라마에서 많은 걸 생각한다.


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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