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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재 Sep 21. 2024

광주극장에 울려 퍼진 평등과 평화의 정신(2)

광주 충장로에 위치한 광주극장은 국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다. 인천 애관극장 다음으로 오래됐다. 개관 이후 9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복합 상영관으로 전환하지 않은 단관극장으로는 국내 유일의 극장이다. 


광주극장 이전 광주 소재 극장시설로는 광주좌와 광남관(제국관)이 있었다. 먼저 광주좌(光州座)는 1916년 무렵 충장로 일대에 일본인 후지가와 다다요시(藤川忠義)가 당시 총공사비 800원을 들여 설립했다. 현재 황금동 파레스관광호텔 자리다. 그 규모는 총 건평 120평에 2층 목조 건물로 입장객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관람석은 의자 없이 일본식 다다미에 앉아 보는 형태였다. 광주 지역 최초의 공연장 겸 극장으로 활동사진 상영과 함께 주로 각종 연주회, 연극 공연 및 예능 발표회 등을 개최했다. 영화 상영 공간이라기보다 공연장으로서 성격이 강했다. 1931년 11월 8일 극장주 후지가와 다다요시가 실내 소형 신사(神社)인 가미다나(かみだな)에 상영할 작품의 고사를 지내다 촛불이 필름에 넘어지면서 발생한 화재로 극장은 전소해 사라졌다.

광남관(光南館)은 전속 영사기사를 둔 광주 지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광주좌 인근에 1927년 개관해 1930년 제국관(帝國館)으로 개칭했다. 제국관 관주(館主)는 일본인 구로세 도요조(黑瀨豊藏)로 이전 시설들과는 달리 야간에 영화 상영이 상설로 이뤄졌다. 또 각종 공연과 행사들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초기에는 500여 석 규모였으나 제국관에 이르러서는 각종 시설 보강으로 복층구조에 700여 석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32년 설립된 일본 대표 영화사인 도호(東寶)의 전속 극장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일본인 경영자가 떠나고 제국관은 일제의 적산(敵産)으로 남았다. 적산 재산은 제국관 시절 오랫동안 근무한 전기섭이 불하(拂下) 받았으며 지배인이었던 최흥열이 경영을 전담했다. 극장 명칭은 해방공간 시기 공화극장(1945), 동방극장(1948) 순으로 바뀌었고, 1955년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무등극장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후 무등극장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멀티플렉스(무등시네마)로 변모했으나 경영난으로 2012년 폐관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주극장 이전의 극장시설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세워졌다. 여기에 일본인 상권이 주로 형성된 본정 1정목부터 3정목(충장로 1가부터 3가)에 위치해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주 이용대상이었다. 지방의 협소한 영화 소비 시장 때문에 일본어가 가능한 상류 조선인들에게는 극장 문을 일부 개방했다. 일본에서 공연장을 의미하는 '좌' 또는 '관'자를 명칭에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취향의 각종 공연예술 활동이 자주 펼쳐졌다. 영화 상영만으로는 극장 영업이 곤란한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일본인 중심 극장 운영이라는 차별적 흐름에 대항해 1935년 본정 5정목(충장로 5가)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광주극장이 새롭게 들어섰다. 광주극장을 세운 이는 학교법인 유은학원의 설립자이자 만석꾼이었던 유은 최선진(崔善鎭) 이었다. 원래 광주극장은 1934년 남해당(南海堂) 악기점 주인이었던 김준실이 ‘모단극장(모던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첫 삽을 떴다. 하지만 자금난에 부딪히자 광주의 신흥 부자이자 유망 사업가로 떠오른 최선진이 인수해 공사를 마쳤다. 일제는 조선인의 사업을 규제하기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만 영업을 허가했다. 따라서 운영 방식은 주식회사 체제를 따랐다. 사장 최선진, 지배인 조응원, 이사는 김희성·조국현·최준기·최동문·유연상이 맡았다. 참고로 최선진이 설립한 유은학원은 오늘날 동성중, 동성여중, 동성고, 광주여상의 모태가 됐다. 

마침내 1935년 10월 1일 광주읍(邑)이 광주부(府)로 승격하던 날 광주극장은 낙성(준공) 한다. 1933년 광주극장 개관을 목표로 법인을 설립한 이후 2년 만에 자본금 30만 원, 공사비 7만 5천 원을 들여 광주극장이 세워졌다. 민족자본에 의해 건립된 광주의 첫 극장이었다. 극장은 건평 400평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2층 구조 건물로 1,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인이 소유한 제국관의 2배 규모로 '조선 제일의 대극장'이라 동아일보는 소개했다. 

같은 달 10일에는 첫 영화 상영까지 이뤄졌다. 첫 상영작은 일본 협동영화사에서 제작한 발성영화 일상월상(日像月像, じつぞうげつぞう)이었다. 첫 상영작이 조선인의 작품은 아니었다. 아마 조선총독부령에 의거 모든 극장은 한 편 이상 일본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지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개관 즈음인 1935년 10월 4일 서울 단성사에서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이 개봉한 것을 살펴볼 때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영화 산업 초기라 배급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수 있다. 결국 춘향전은 1936년에야 광주극장에 간판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 상권은 일본인 상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하고 외곽인 본정 4,5정목(충장로 4,5가)에 분포해 있었다. 조선인이 세운 광주극장은 조선인의 상업활동이 활발한 본정 5정목에 세워졌다. 기존 일본식 '좌' 또는 '관'자 대신 '극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일본인 중심의 기존 극장과 차별성을 두었다. 또 일본인 극장을 압도하는 대형 규모로 건축함으로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함과 동시에 많은 군중이 운집 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한국 고유의 악극 및 판소리를 극화한 창극 공연과 조선 영화를 비중 있게 개봉해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는 광주극장이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는 문화적 저항의 공간이자 각종 교육과 집회를 통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결집하는 소통의 공간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에도 남아 광주극장은 방화 위주, 무등극장은 외화 위주의 상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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