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 김구,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이자 겨레의 큰 스승이다. 그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수록돼 정부 수립 법통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했다. 또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결행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추축국에 맞서는 등 대한 독립운동의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 백범 일지는 전 국민의 필독서로써 1997년 대한민국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범의 의미를 '하얀 호랑이' 즉 ' 白범(호랑이)'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심히 한자(漢字)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쉬 알 수 있다. 실제 그의 호(號)에서 뒷글자 범은 무릇 범(凡) 자로 호랑이라면 범 호(虎)를 사용해 백호(白虎) 라야 맞을 것이다. 아마 순수 우리말인 '범' 자가 우리 머릿속에 호랑이로 각인돼 있는 데다 그의 듬직한 인상과 풍채, 독립운동가로써 존경받는 민족의 큰 인물이라는 점이 자연스레 호랑이를 연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럼 백범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러 해석보다 백범 일지에서 그가 직접 밝힌 내용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백범 일지에는 그 뜻을 설명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바로 출간사 말미와 수감생활을 회고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 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 년 십일월 십오일(1947. 11. 15.) 개천절 날.
[출처] 백범 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15p<출간사>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 (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 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 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 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 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라고.
[출처] 백범 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267p<식민의 시련>
백범 일지에 따르면 백범의 ‘백’은 조선시대 하층계급 신분이었던 백정(白丁)에서, ‘범’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의 범부(凡夫)에서 따온 말이다. 특별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나 자신도 독립운동에 투신해 공헌한 바가 있을 진데, 대한 사람 누구라도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면 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각 있는 다수의 애국 독립투사들이 새로이 등장하길 원하는 염원이자 조선동포라면 최소한 나 정도의 애국심은 가져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도 나의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요를 만세 삼창하듯 본인의 또 다른 이름에 아로새긴 담대한 모습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출처] 백범 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423p<나의 소원>
백범은 일지에서 말한다.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수립되면 나라의 뜰을 쓸고 나라의 창호(窓戶)를 닦는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아니 기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그 일을 할 수 있게 맡겨 달라고. 그는 독립운동의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백범(白凡)으로의 삶을 살고자 했다. 이러한 백범의 정신은 평범함은 곧 비범함으로, 비범함은 다시 평범함으로 남아 국난의 어려운 시기마다 의로운 시대정신으로 우리를 일깨운다.
임시정부 문지기가 되고자 했던 백범이 생을 마감한 지 어느덧 70여 년이 흘렀다. 그가 꿈꾸던 나라는 영웅호걸이 아닌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평범한 범부(凡夫) 들에 의해 하나씩 이뤄져 가고 있다.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K-컬처로 대변하는 진정한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다. 마음 좋은 사람 호심인(好心人) 백범, 그의 환한 웃음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출처] 백범 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423p<나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