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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린 산천어 Aug 24. 2023

대한민국 예의범절 뜯어고치기

예의삼백 위의삼천은 즉 버르장머리 삼백 싸가지 삼천!

중국 포털사이트 知乎(즈후)에서 찾은 그림. 공자라는 듯.


 '버르장머리'는 버릇을 구어적으로 이르는 말인 ‘버르장이’와 중요한 핵심을 뜻하는 ‘머리’의 합성어입니다. 버릇은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습관”입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사회에서든 예(禮)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생기는 각종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말과 행동의 규범과 표준이 생겨났습니다. 거듭되는 말과 행동은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버릇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입니다. 중요한 예, 예의 핵심이 바로 버르장머리입니다.


 '싸가지'는 “씨, 줄기, 뿌리 따위에서 처음 돋아나는 어린잎이나 줄기”를 뜻하는 ‘싹‘과 작은 것과 새끼를 뜻하는 접미사 ‘-아지’의 합성어입니다. ‘싹’은 식물의 아이이고 ‘-아지’는 동물의 아이인 것을 보았을 때 싸가지는 생명력을 가진 모든 것의 아이를 은연 중에 의미합니다. 그러나 싹에서 파생된 비슷한 말인 ‘싹수’의 뜻이 “어떤 일이나 사람이 장차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조짐”이라는 사실을 봤을 때 싸가지는 아주 자잘하지만 하잘것없지는 않은 중요한 씨앗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기를 생명처럼 활발하게 하고, 작은 것을 미루어보아 더 크고 넓으며 많은 범주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예가 바로 싸가지입니다.


『예기』에서는 경례(經禮)가 삼백가지, 곡례(曲禮)가 삼천가지 있다고 하며 『중용』에서는 예의(禮儀)가 삼백가지, 위의(威儀)가 삼천가지 있다고 합니다. 경례와 예의는 사회의 뿌리가 되는 의례(禮)이며 곡례와 위의는 가지가 되는 의례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자를 버르장머리라고 하고, 후자를 싸가지라고 합시다. 한자어가 번잡하게 많아서 어려울 수도 있다면 경례와 예의는 매너가 좋다 할 때의 매너이며, 곡례와 위의는 에티켓이 있다 할 때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어원과 맥락이 있기에 무조건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버르장머리는 넓으며 싸가지는 좁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버르장머리와 싸가지는 '씨발'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속어(俗語, slang)입니다. 속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격을 낮추고 천박하여 교양없게 만드는 말입니다. 가령 앞서 말한 씨발은 마찬가지 여성의 성기를 속되게 일컫는 '씹'의 관형형 '씹할'의 발음이 쉽게 바뀐 형태입니다. 상대를 낮추고 헐뜯으며 놀림감으로 삼는 말에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버르장머리와 싸가지는 속어임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남을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과 근거가 예의에 있습니다. 모순덩어리의 단어이죠.


 우리 사회에는 버르장머리와 싸가지만큼이나 앞뒤가 안 맞는 속된 말과 더불어 예의라고 하기에는 저급하고 다분히 악의에 가득찬 명분에 예의라는 가면을 뒤집어 씌워 무기로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유교란 사회를 의롭게 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익을 독식하고 타인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예의를 모르면서 버르장머리를 말하고 범절을 모르면서 싸가지를 말하는, 버르장머리없고 싸가지없는 난신적자(子, 나라를 어지럽히고 빼앗으려는 죄인)입니다.


 『논어』에서 공자(孔子)는 현대에는 행하지 않는 삼년상을 인간으로서 꼭 지켜야하는 기본적인 예라고 말하고, 양을 제물로 바쳐 지내는 제사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2500년이나 지나서 태어난 우리가 삼년상과 희생양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공자는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요구에 따라 예를 말했을 뿐, 만일 지금 이곳에 공자가 다시 돌아온다면 굳이 삼년상과 희생양에 대해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사회에 맞지 않는 예라면 바꾸고 시대에 필요한 예라면 가져다 쓴 것이 바로 공자입니다. 『버르장머리 삼백 싸가지 삼천』은 유교의 본질적인 예를 다루는 글입니다. 나아가 유교적인 논리로 유교를 참칭하는 적폐를 소탕하는 글입니다. 유교의 예가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핑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제시하는 대의명분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고 다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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