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체스 Sep 26. 2021

여행 중 '성공한 인생'이라는 기분이 드는 순간

여행 중 달리기를 한다는 것

여러분은 '아아~  정도면 성공한 인생인  같애'라는 느낌이  때가 언제인가요?  출고한 럭셔리 세단에 키를 꽂자 경쾌한 시동음이 들릴 ? 아파트 발코니에서 한강의 화려한 야경을 안주 삼아 와인잔을 기울일 ? 햇살에 반사된 잔디밭의 푸릇푸릇한 빛에 한쪽 눈을 찡긋하며 티샷을  ?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성공의 맛'에 도취되는 순간은 제각각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해외여행 중 운동을 할 때다. 정확히는 호텔에 딸린 피트니스 센터에서 트레드밀에 오르는 순간이다. 어째서냐고? 그것은 단순하다. 성공한 인생이래야만 가능한 일 중 하나니까 그렇다. 그게 성공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오늘은 '여행 중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운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이것도 운동 얘기긴 한가?)

해외여행  호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헬스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싸구려 숙소는 아니라는 의미다. 나는 대체로 잠을 아무데서나  자는 스타일이고 자린고비 성향이 어느 정도 있어서 -어느 정도 있는  아니라 심하다- 숙소에 투자하지 않는다. 비를 막아주는 지붕과 몸을 뉘일 침대가 있고, 에어컨까지는 아니더라도 냉난방 시설이 있으면 된다. 단독 화장실이 딸려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조식 뷔페는 바라지도 않는다. 있으면 좋지만,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역시도 살짝 '성공의 '   있다.

어느 작가는 호텔 조식 뷔페를 먹으며 자신이 성공한 인생이구나 하는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완벽히 다려진 뽀송뽀송한 침구의 린넨에 얼굴을 부비며 감격한 사람도 있다. 100% 아니지만 그런 기분에 나도 대체로 동의한다.


아무튼 이런 나에게 그 이름도 거룩한 '호텔'이라니, 게다가 피트니스 센터를 가지고 있다니,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던 호강인 셈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호텔 헬스장에서 조깅을 하게 되면 '아아, 나름 성공한 인생이구나'하는 감회에 저도 모르게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것이 '여행 중 운동'과 '성공한 인생'의 첫번째 연결고리다.

캄보디아 씨엠리업의 $4/1박 방. 에어컨이 있는 방은 8달러여서 실링팬이 있는 이 방에 묵었다
몰디브의 어느 리조트의 러닝머신. 노출 탓에 바다가 안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연결고리. 해외여행 중에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유'를 의미한다. 여간해서는 해외여행 중에 운동을 하기란 쉽지 않다. 운동중독이라면 또 모를까, 나는 평소에도 운동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하물며 여행 중에랴. 그러나 해외여행 중에 운동을 한다는 것은 '관광을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곳을 여유 있게 즐기고 있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패키지여행 중에 운동이 가당키나 한가? 한 달짜리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조깅이라니?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바로 성공의 맛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리하여 특급호텔 로비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를 지나처 체크인을 하러  때보다, 미슐랭 투스타 식당에 예약 리스트에서 나의 이름이 불러워질 때보다 호텔에서 운동을   '성공한 인생일지도 몰라' 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전자의 경우가 경제적 관념에서 계산한 성공의 수치로는  높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갑을 과감하게 열었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지갑은 과감하게 열면서 부들부들 떨었다면 오히려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곳을 여행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는다'라는 마음가짐을 들게 해주는 운동 쪽이 오히려 성공의 느낌에 가깝다.


속초 더블루테라 호텔 28층의 자그마한 헬스장. 속초에서 가장 높은 빌딩 중 하나인 이곳에서는 설악산을 마주보며 달릴 수 있다. 비즈니스급 호텔이다.

여행  달리기는 여행에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얘길 하고 싶다. 다들 알다시피 하루키는 달리기 마니아다. <달리기를 말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에세이 책을  정도로 하루키에게 달리기란, 글쓰기와 함께 인생의  축을 이룬다. 그는 여행 중에도 달리기를 가급적 놓지 않는다.


하루키는 주장한다. 한 도시를 여행하기에 자동차는 너무 빠르고 걷기는 너무 느리다. 달리기 정도의 속도가 도시의 세세한 풍광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넓은 커버리지로 그 지역을 둘러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여기에 나는 하나의 주장을 덧붙이고 싶다. 자동차와 도보의 속도에서 볼 수 있는 풍광과 시각적 정보는 그 지역민과 여행객 모두 공통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달리기의 속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풍경과 감흥은 여행자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오로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주민만이 얻을 수 있다. 즉 여행자로서 그 지역을 달린다는 것은 그 지역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잠시나마 하는 셈이다.  

여행 중 마주친 조깅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멋진 피사체가 된다. @윌리엄스버그, 뉴욕

앞서 말했듯이 나는 운동이라면 손사래를 쳐가며 기피해온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여행법이란 최대한 시간을 아껴가며 많은 곳을   있는 동선을 짜는, 소위 빡빡한 타입의 여행이다. 운동이 파고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직장인이 늘 그렇듯이 1년에 한두 번가량, 일주일 정도의 휴가가 전부다. 안 가본 곳을 최대한 많이 가보는 것이 -이는 내 호기심 탓으로 돌리겠다- 내 여행 취향이기에 여유 따윈 사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 없는 '여행 중 달리기'의 경험은 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이 좋은 것을 나는 여태 왜 몰랐을까.


시드니가 내게 유난히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있는 것은, 오페라하우스 덕도 코알라 덕도 아니다. 하버뷰를 즐기며 달렸던 조깅 코스 덕분이다.

시드니는 세계적인  대도시중 하나다. 2,500만 명의 호주 인구 중 1/5이 넘는 530만 명이 시드니에 살고 있다. 그러나 호주는 넓다. 시드니도 넓다. 서울시의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당 16,000명이라면, 시드니는 고작 400명도 되지 않는다. (물론 시드니 광역권이 그만큼 넓은 탓이긴 하다)

시드니의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즉 우리로 치면 명동과 광화문에다가 강남과 신촌을 합친 것 같은 핵심 상업 지구의 인파는 여느 메트로폴리스와 다름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몇 분 정도만 걸으면 시야가 뻥 뚫린 공간이 등장하고 달리기에 그지없이 좋은 길이 열린다.

 

맞은 편에 CBD의 마천루가 보이는 달링 하버의 해변

   11월의 시드니는 여름이 시작하기 직전으로 밤낮으로 20도 안팎의 기온을 보인다.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계절. 뛰면 땀이 나고 멈추면 땀이 식는 정도의 날씨다. 신발 끈을 동여 매고 호텔을 나선다. 공기를 캔에 담아 중국에 팔 정도로 청정한 호주의 공기를 폐에 가득 마시며 달린다. 그것도 공짜로.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바닷물에 햇살이 일렁인다. 달링하버, 그 이름도 로맨틱한 darling harbour다. 계류장을 떠난 요트에서 아이들이 해변을 달리는 이 동양인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오른편에는 해안과 마천루가 우뚝 서있고, 왼편에는 노천카페와 잔디밭이 줄곧 이어져있다. 그 사이를 두 발로 절벅절벅 뛴다. 마음으로는 겅중겅중 뛰고 싶지만 짧은 내 두 다리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이어폰에서는 오래된 호주 밴드인 맨엣워크의 80년대 히트팝이 울려 퍼진다.

가끔씩 해안의 데크 위를 걷던 갈매기가 나의 돌진에 푸드덕하고 날아오르지만 비둘기가 아닌 이상 -아, 맛 좋은 비둘기- 눈살이 찌푸려질 리 없다. 그리고 저 길 끝에는 호주 최고의 미트파이라고 불리는 해리스 푸드트럭이 날 기다린다. 으깬 완두콩을 잔뜩 올린 미트파이를 사서 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으며 숙소에 걸어 돌아가는 거지.

그렇다. 시드니라는 여행지는 내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달링 하버, 시드니
'해리스 캬페 드 휠'의 Pie n' Peas

지중해를 가르는 크루즈에서의 조깅도 잊을  없다. 내가  크루즈는 뱃머리에 실내 피트니스 센터가 있었다. 뱃머리 모양 그대로 삼각형으로 생긴 센터의 앞쪽은 통유리로 되어 있고 러닝머신 십수 대가 바다를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위를 달리고 있노라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마치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I'm the king of the world"라고 외칠 때의 기분과 비슷한 종류의 체험을, 트레드밀 위에서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갑판 위에도 조깅 트랙이 그려져 있어서 실외 조깅도 가능했다. 배의 길이가 330m가량이었으니 한 바퀴가 대략 600m가 넘는 코스가 된다. 섬 하나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서, 자동차 매연 한 줌 섞여 있지 않은 지구 본연의 공기를 마시며 달릴 수 있다. 순수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에 가까운 달리기다.   

대형 크루즈 선박에서 며칠을 항해할 때, 운동중독자들은 이런 시설이 없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거대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사이즈다. 너비 330m가 되는 18층 짜리 아파트가 떠다닌다고 생각하면 된다. 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보지 않는 이상 상상하기 어렵다

가장 아쉬운 것은 뉴욕에서   번도 달려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뉴욕 여행의 기회가 있었지만 달리는 것을 생각조차  해봤다.  그랬을까.  지구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는 장소  하나인 뉴욕을, 달리기의 속도로 느낄 생각을   했을까. 뉴욕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보고 먹고 즐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같다.

뉴욕은 끊임없이 변한다.  년만 지나도 새로운 볼거리와 명소가 생기는 것을 어쩌랴.  


다음 뉴욕 여행 때는 꼭 러닝화를 캐리어에 쑤셔 넣으리라. 뉴욕에 사는 행운을 내 생에 누려보지는 못할지언정 단 한 시간만이라도 뉴요커가 되어보는 기분, 거기에는 허드슨 강변을 달리는 조깅만 한 것이 없으리라.


만일 당신이 어느 도시를 4~5박 이상 머무르게 된다면, 꼭 한 번은 운동화로 갈아신고 아침 거리를 달려보라. 서울에서 듣지 못하던 낮선 새의 지저귐이 당신을 반길 수도 있고, 코너를 돌다 갑자기 빵 굽는 냄새가 당신을 맞이할 수도 있다. 동터오는 하늘 저편 어딘가에서 아잔 소리가 당신의 러닝을 격려하는 주문으로 들릴 수도 있고, 맞은편에서 뛰어오는 현지인이 '하이~'하는 인사에 나도 모르게 쭈뼛 손을 올리다 어색한 웃음을 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순간 '지금 내 몸의 2% 정도는 이 지역에 동화되었구나' 하는 감흥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한 '성공의 맛'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도 알 수 있게 된다.


일상 속에는 수많은 소확행이 있지만,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 너무나 무뎌져버린 것이다. 그럴 때는 작은 자극이 필요하다. 행복을 과녘으로 삼는 방아쇠를 당길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단언하기를, '아아, 내 인생도 나름 나쁘지 않구나'하는 작은 감동을, '여행 중 운동'을 통해 누려보길 바란다.

@센트럴파크, 뉴욕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

#뉴욕 #시드니 #조깅 #피트니스 #운동 #해외여행 #여행 #러닝 #운동화 #조깅화 #러닝화 #호텔 #지중해 #크루즈


p.s. 한때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는 것에 해외여행의 재미를 붙였던 적이 있다. PP카드를 발급받아 전 세계 공항의 라운지를 이용하며 공짜 음식과 술에 탐닉했다. 라운지를 만끽하기 위해 일부러 공항에 서너 시간 전에 도착했다. 이제는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안다. 어차피 보딩 하면 기내식과 음료, 주류가 공짜로 제공된다. 미리 배를 불려봤자 기나긴 기내에서의 시간이 속더부룩함으로 더욱 괴로울 뿐이다.

@아시아나 퍼스트 라운지, 인천공항 1터미널



알그몰그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 해외여행 초보자를 위한 정보. PP카드(priority pass)에 대하여

 공항 라운지는 상위클래시 승객을 위해 만들어졌다. 항공사가 보통 운영을 하나 모든 항공사가 라운지를 각각 운영하기에 부담이 될 수도 있어서 사설 라운지도 있다. 타 항공사 이용승객이나 이코노미 승객들도 유료 입장이 가능한데 보통 30달러 안팎. 그런데 PP카드가 있으면 전 세계 1,200여 개 라운지를 무료입장할 수 있다. PP카드의 1년간 연회비는 299달러. 그러나 이 돈을 내고 가입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신용카드 중에 연회비 10만 원을 상회하는 몇몇 카드들이 PP카드를 무료로 발급해주기 때문이다. PP카드를 제공하는 신용카드가 궁금하다면 네이버 검색. (혹은 카드고릴라 방문하세요)


- 크루즈 여행

한국인에게 크루즈 여행은 낯설다. 비싸다고 생각이 들고,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의외로 특히 북미와 유럽에서는 크루즈 여행이 매우 대중화, 보편화되어 있다. 우리네 시골아줌마 아저씨들이 계돈 부어서 동남아 패키지 관광을 떠나듯이 유럽의 시골 아저씨 아줌마들이 크루즈 여행을 간다. 비수기에, 크루즈 내의 가장 싼 방에 묵는다면 1인당 1,000달러 정도면 7박 8일간 먹고 자면서 크루즈에서 보낼 수 있다. 아침 점심은 뷔페, 저녁은 담당 웨이터가 서브하는 정찬 코스요리가 제공된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루즈는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서부 지중해를 도는 코스, 동부 지중해를 도는 코스, 카리브해를 도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을 다니거나, 알래스카를 다니는 비교적 '추운' 크루스 여행도 유명하다.

크루즈 관련 정보를 얻고 싶다면, 크루즈닷컴.


- 아잔

무슬림들이 예배의 시작을 알릴 때 혹은 기도를 하기 전에 내는 일종의 외침이다. 이슬람 국가를 방문하고 있다면, 하루에 다섯번 이 아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스크의 미나렛(첨탑)에 달린 확성기를 통해 아잔 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려퍼진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 어디까지 먹어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