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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Jul 14. 2019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25세 패션피플에게 브런치를 하라고 이야기했다.

패션피플-그녀는 강렬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왔다. 그러므로 편의를 위해 그녀를 '바다'라고 지칭하도록 하자. 오랜만이었다. 25살인 바다는 여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패션을 공부하고 있었다. 바다의 부모님은 그녀가 법학을 공부하다가 패션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바다가 예술 계통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바다는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나는 그 아이가 변호사가 되어 꽤 높은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녀가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놀랐었다.


오랜만에 바다를 만나게 된 것은 딸아이가 수족구에 걸렸기 때문이다. 수족구에 걸린 아이를 유치원에서 받아주지를 않았다. 꼼짝없이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를 봐야 했다. 평소라면 별 문제없었겠지만 지금 아이는 밥을 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몸이 아픈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가 뛰어 놀 수도 없었다. 5살짜리 아이와 집에서 종일 죽치고 앉아 그림이나 그리고 책이나 보는 것은 평소에 하라고 해도 쉽지 않을 일이다. 이에 더해 아이는 밥을 먹지 못해서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도저히 아이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용돈을 주겠다고 하고 바다를 불렀다. 아이와 씨름하다 파김치가 되어 미쳐버리기 바로 직전에 마침내 그녀가 집으로 왔다. 아주 늦게 말이다. 젠장. 용돈은 하루치를 다 불렀는데.


그럼에도 신의 한 수였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5살 못된 꼬맹이가 예쁜 이모가 집에 오자 갑자기 얌전해졌다. 식탁에 앉아서 얌전히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옆에 두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처음 나눈 대화였던 거 같다. 우리는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10살 차이 나는 사촌동생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겠는가? 아마도 어릴 적 내가 게임을 할 때 바다가 귀찮게 해서 나가라고 소리쳤던 것이 마지막 대화였을 것이다.


바다가 한때 지금의 내 딸과 같은 5살 꼬맹이였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 꼬맹이가 어느새 자라서 인생의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는 사실이 대견해 보였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었다. 바다가 법을 공부하던 시간만큼 출발이 늦었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옷을 만드는 것이 즐겁다고 했지만 분명 어느 순간 즐거움 만으로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바다가 갈 길에는 커리어에 한점 낭비 없이 정점을 향해 달려왔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대체로 바다보다 최소 3~4살은 더 어릴 것이다. 그들 또한 바다만큼 옷을 좋아할 것이고 재능 또한 부족함 없이 넉넉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열정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한다고 할지라도 바다에게는 아마 꽤 낮은 박봉의 시간이 길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바다가 이겨내야 할 끝판왕은 아니다. 바다가 마주할 최후의 적은 아마도 스페인과 일본과 중국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무자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질 좋고 예쁜 싸구려 옷들일 것이다. 바다는 궁극적으로 저임금 국가의 재능 있고 열정 있는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우려를 표시할 수 없었다. 그건 조언도 충고도 뭣도 아닌 개소리에 불과하니까- 바다 스스로도 앞으로 처할 상황이 수목 드라마와는 다를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 명료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바다에게 브런치를 해보라고 했다.


바다에게는 돈과 인지도와 영향력이 없다. 끗발 좋게 취업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2년 남은 학업 기간 동안 그녀는 토익점수를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인턴 경험을 만들고, 취업에 좋다는 이런저런 활동을 하러 쫓아다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그녀의 작품 퀄리티에는 전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게 뻔하다. 결국 바다는 변호사가 법률의견서를 작성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으로 옷을 만들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끗발 없는 자들은 취업을 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취업을 하지 못하면 패션으로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다가 내린 인생의 결정과 공부한 모든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남은 기간 인지도와 영향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취업준비처럼 불필요한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그녀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바다가 브런치에 구독자 1만 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그녀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이곳저곳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많은 제안을 받게 될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사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바다는 자신의 작품과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살아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봐 주고 애정 어린 의견을 전해준 그런 포트폴리오 말이다.


브런치에 그녀의 작품과 이야기를 올려보라고 이야기했다. 브런치 사용자가 많지 않지만 하지만 상관없다. 브런치에서 먹히는 콘텐츠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어디서든 먹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다의 콘텐츠는 꽤 괜찮을 것 같다. 법학에서 패션으로의 진로 전환, 포기해야 했던 유학, 에르메스와 프라다 그리고 무인양품에 대해 널려 있는 수많은 일화들. 무엇보다 바다가 만들어낼 형형색색의 작품 사진과 그 과정에서 나올 수많은 일러스트까지 말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자신의 콘셉트와 작업 방향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취향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벼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벼림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바다가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란 그녀의 작품에 그다지 관심이 없을게 뻔한 교수와 여러 애증관계로 얽혀있을 동료들이 전해줄 진부한 크리틱들 밖에 없다. 이런 피드백은 사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내가 바다라면 나는 현재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진을 올려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의 색을 확인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작품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고민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더 나은 개선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예술적인 동시에 상업적인 방식으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배우기 위해서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전혀 같지 않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류해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그것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써보는 것이다. 패션 같은 주제에 대해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거의 없을 테니 바다는 결국 패션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만 바다는 자신이 공부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이 배운 것들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이야 배우고 있는 것이 바로 근처에 있고 손에 닿는 내용이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아마 1년, 2년, 5년이 지나면 지금 공부하고 있는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큰 시간 낭비다. 하지만 만약 바다가 지금 배우고 있는 내용들을 지금의 감성과 경험들과 묶어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그 지식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잊혀지지만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앞으로 컨테이너선과 이메일을 따라 융단폭격처럼 떨어질 그 모든 경쟁과 시장 변동에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사람들은 이야기를 먹고, 입고, 마시고,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니까. 모든 사람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일상과 직장과 사람에게서 좋은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서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삶에서 정말 좋은 이야기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나는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 문장이 나를 떨리게 한다고. 내가 쓰는 글이 나를 위로해 준다고. 나를 무적의 존재처럼 느끼게 해 준다고. 너에게도 그러길 바란다고. 그래서 나는 바다와 그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내 딸에게 이야기했다. 너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달라고. 내 딸은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다는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한번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모두 30대의 내가 20대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나는 건축을 좋아했고, 건축을 공부했었다. 그때 나는 정신줄이 나간 천재 건축가들의 기행과 그들이 만들어낸 신기(神氣) 어린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잘 잡아서 글로 만들어 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 내가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두려움을 일기장에 쓰고 서랍 속에 처박아 두는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떠들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되었을까? 그때 내가 진행하던 프로젝트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작품에 1%의 관심도 없는 교수나 마감에 찌든 동료들에게 크리틱을 받는 대신에 말이다. 그랬다면 불필요한 불안감에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작품에 확신과 애정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취업 준비 같은 것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관심 없는 주제에 관한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진행하던 프로젝트들도 훨씬 완성도 높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훨씬 더 즐거웠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훨씬 높았을 것이다. 안타깝다. 그것이 참 안타깝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현재의 일상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지루하고, 변변치 않고, 쌍욕이 나올 정도로 멍청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이러한 내 삶에도 쓸만한 이야기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몰랐었다. 내 삶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중 가장 반짝거리는 알맹이들을 모아 당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당신이 있어 글을 쓰는 것이 즐겁다.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도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에 'B형 은행원'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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