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엄마의 항변
곤쥬는 어려서부터 지독히도 낯을 가렸고 좋게 말하면 매사에 조심스럽고 나쁘게 얘기하면 소심했다.
항상 겁이 많았고 늘 엄마와 함께 했음에도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울고 남들이 울면 같이 울고 아무도 안 울어도 혼자 우는 아이였다.
가뜩이나 그런 성격에 프리스쿨을 제대로 다녔더라면 조금 나았을 텐데 여러 여건상 한 학기가 채 못되게 그것도 반나절밖에 다니지 못했으니 킨더*에 진학하는 건 사실상 처음으로 full-time(보통 8시 반에서 3시 반) 자기만의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었다.
*미국의 kindergarten_킨더(kinder)라 부름_은 보통 초등학교에 속해 있어 행정상 초등학교 과정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full-time으로 초등학교가 속해 있는 district(학군)의 calander(학사일정)를 그대로 따른다. 따라서 킨더에 간다 함은 정규 교육의 첫걸음이요 우리나라의 초등 1학년 입학 같은 개념으로 본다. 킨더 전에는 만 3세~5세까지 2년간 pre-school에 다니는데(취학 전 유치원의 개념) 두 돌만 되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는 한국 아이들과 달리 미국 아이들은(맞벌이 가정 포함_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음) 엄마들이 킨더 전까지 집에 데리고 있다가 킨더를 첫 교육 기관으로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만 5세가 넘어 킨더에 와서야 A, B, C를 배우는 아이들도 꽤 있으니 초딩 입학도 전에 영유를 다니며 알파벳을 떼는 아이들을 보아온 한국 엄마들에겐 충격적이긴 하다)
그래서 주변에서 여건이 된다면 킨더를 사립에서 시작해 일단 학교 생활 적응하고 나면 초등 과정을 공립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 했을 때 걱정되는 마음에 잠깐 팔랑귀가 솔깃하긴 했다. 하지만 사립 초등학교 나와서 공립 중학교 왔을 때 겪었던 문화적(?) 충격을 기억하는 남편은 부모가 평생 특별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책임질 거 아니면 과도한 배려와 개입은 독이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고 이미 수치로 검증된 학군에서 이웃들과 동일한 공립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가 부모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말 때가 있다는 말이 맞는지 당연히 다리에 매달려 울고불고 안 가겠다 할 줄 알았던 곤쥬와의 이별은 의외로 수월했다. 눈빛이 잠깐 흔들리며 입꼬리가 내려갈 뻔했지만 본인도 여기서 터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지 얼른 입술에 힘을 꼭 주었고 꼭 잡은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뜯어내며 눈물 없는 이별에 성공했다. 초조한 하루를 보내고 1등으로 픽업을 갔는데 활짝 웃으며 나오는 꼬맹이를 보고 대견한 맘에 앞서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울컥했더랬다.
그렇게 soft landing 할 것 같았던 아이가 2주쯤 지났나. 피곤해서, 재미없어서, 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슬슬 학교 가기가 싫다고 했다. 유치원도 첫 주보다 원래 둘째 주에 우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했던가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그럴 때가 됐는갑다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어르고 달래곤 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점점 대수로운 일이 되어갔다. 이유 없이 울고 짜증 내는 날이 많아졌고 학교 얘기를 물어보면 몰라, 그냥 얼버무리며 잘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킨더 아이들은 교실 문이 밖으로 나 있어서 학교 정문을 거치지 않고 부모들이 교실 앞까지 데려다줬다(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님). 문이 열릴 때까지 한 줄로 쪼롬히 서 있다가 문이 열리면 차례차례 선생님께 Hi, 부모님께 Bye, 쿨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꽤나 미국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긴장해서 한 줄로 반듯하게 서 있지만 며칠 사이에 그새 친구가 생긴 아이들은 한쪽 구탱이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끼리끼리 모여 앉아 쑥덕쑥덕 키득키득 장난치고 놀다가 덜커덕 교실문이 열리면 그제야 가방을 들고 줄을 섰다.
곤쥬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 자리에 서서 가방을 멘 채로 앞만 보고 있는 아이였다. 기다리는 동안 왜 친구들하고 같이 안 놀아? 오늘 아침에 왜 릴리랑 인사 안 했어? 물어보면 딴청을 하거나 못 봤어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다 하루는 집에 와서 간식을 먹다가 갑자기 울음보가 터졌다. 학교 가기 싫다며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통곡을 했다. 딴에는 용기를 내서 You wanna play with me? 라고 했는데 No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세 번 recess**를 나가는데 아무도 같이 안 놀아서 그 시간이 너무 싫다는 것이었다.
**미국 학교는 일과 중에 학년에 따라 의무적으로 정해진 시간만큼의 outdoor recess를 갖는다. 한국의 체육 시간과는 달리 20-30분 정도 놀이터나 잔디밭 등에서의 free play 말 그대로 노는 시간이다. 풀어놓으면 뛰어나가는 강아지 같은 남자애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바쁜 반면, 여자 아이들은 프리스쿨 때와는 달리 옹기종이 모여 놀거나 서로 그네를 밀어주거나 하기 때문에 딱히 친구가 없던 곤쥬는 픽업 때 가보면 늘 혼자 그네를 타고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혼자 있던 곤쥬와 지들끼리 모여 놀면서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은 점점 분노로 바뀌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인가?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 촌것들이 아시안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했던 분노는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내 딸이 이 꼴을 당하는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억울한 원망이 되어 쏟아졌다.
***실제로 아이오와(Iowa) 주는 미국 내에서도 유색인종의 비율이 가장 낮다. 아이오와 주의 작은 캠퍼스 타운인 Iowa city는 대학 중심의 도시라서 주변 지역에 비해 외국인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는 거주지역(residential town)의 타운 하우스는 유학생들이 모여사는 아파트 지역이 아니라서 우리 학군 내에는 Asian이 많지 않았고 특히나 우리 아이 반에는 유독 동네 토박이인 백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애가 저렇게 되도록 선생님은 뭘 한 거야 당장 따질까 했다가 미국 학부형의 문화를 겪어보질 못했으니 유난스런 Asian엄마 성화에 괜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러게 왜 진작에 사립을 보내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옮길까 후회하고 끙끙거리던 며칠 동안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누군가는 플레이데이를 한번 제대로 열어서 기를 팍 죽여놓으라고 했고(혹자는 아예 집을 바비 하우스로 꾸며 집에 갈 때 customized 바비 인형을 담은 구디백까지 챙겨주었다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여자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최신템들로 입히고 챙겨 보내라, 심지어 화교 출신으로 그곳에서 한국식 중국집을 하고 계시는 분께서는 당신 아이가 비슷할 일을 겪을 때 발룬티어로 학교에 가서 아예 수타면 뽑는 걸 보여줬더니 이후로 아이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신화같은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아이들이 힘들 때 엄마는 기댈 쿠션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이 엄마의 쿠션은 참으로 얇고 가벼워서 애가 기가 죽으면 그걸 보는 나는 속이 터질 거 같았고 애가 불안해하면 지켜보는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아침 등굣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학교 가는 월요일이 두려워 애보다 내가 월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니가 먼저 인사를 해보면 어때? 아침마다 누가 지나가면 인사해 인사해 자꾸만 옆에서 찌르고 내가 그럴수록 곤쥬는 어떻게든 안 마주치려고 (딴에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거 같다) 땅만 보고 걷다가 그 애가 지나가면 못 봤어 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어떤 날은 그 맘이 이해가 가서 안타까웠고 어떤 날은 그 맘을 알면서도 왜 니가 못해 너 바보야? 속상한 맘을 다그치고 윽박지름으로 토해내기도 했다.
두어 주쯤 후였나.
교회에 어떤 권사님께서 흑인 남자와 국제결혼을 한 따님의 아이, 손녀딸을 데리고 오셨다. 누가 봐도 흑인으로 보였던 그 아이는 한국말을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할머니가 한국 아이들이랑 친해졌으면 해서 한인 교회에 데려오신 모양이었다. 주일학교에서 무심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그 아이는 내내 혼자였다. 선생님이 한두 번 같이 놀자고 끌어다 놓으면 그것도 그때뿐 곧 원래 친구들끼리 까르르까르르 장난치고 노느라 사실상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 난 알았다.
아이들은 굳이 그 아이를 따돌린 게 아니고 생긴 거 다르고 말도 안 통하니 굳이 함께 놀려고 하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누군가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따뜻하게 챙겨줬더라면 좋았겠지만 만 5세 아이들에게 그런 성숙함을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꿈도 야무진 게 아닌가. 그건 그 아이들이 나쁜 아이들이어서가 아니고 인종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 시골이기 때문도 퍼블릭이기 때문도 아닌 그냥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날부터 요동치던 나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엄마도 여기 와서 모든 생활이 낯설고 힘들어. 사람마다 더 쉽게 혹은 더 어렵게 느껴지지도 하지만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려. 어떤 날은 좀 더 심심하고 어떤 날은 좀 덜 심심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누군가 말을 걸기도 하고 또 니가 먼저 걸게 되는 날도 있을 거야. 너도 모르게 어느 날 친구가 생기고 리세스가 기다려지게 될 거야. 대신 누군가 물리적인 폭력을 쓰거나(침을 뱉거나 발을 밝거나 짓궂은 또래 아이들이 악의 없이 할법한 행동이지만 충분한 컴플레인의 사유가 되는) 의도적으로 나쁜 말을 하거나 너에게 해를 가한다고 생각하면 엄마한테 말해죠.
곤쥬가 그 말을 알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그렇게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다음 날도 곤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등교했고 리세스에서 혼자 그네를 탔다. 겁 많고 더딘 내 딸이 그렇게 한 학기 내내 혼자 보내는 동안 난 수타면도 뽑지 않았고 플데를 열지도 않았다. 한두 번 책 읽어주는 발룬티어를 했지만 아이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곤쥬의 근황 파악 차원 정도? 여전히 친구는 없었지만 걱정했던 해를 가하는 아이들도 없었고 좀 나아졌나 싶으면 다시 시무룩해지기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2학기가 되자 주류 그룹에 끼지 못한 아이들과 하나둘씩 친해지더니 학년이 끝날 때쯤엔 비주류, 소위 아싸 그룹의 리더가 되어 인싸 아이들과 퀴즈 대결을 하며 놀게 되었다.
지금 11살이 된 곤쥬는 그때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누군가 새로 오거나 영어를 못해 적응하지 못하면 먼저 다가가 주는 아이가 되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천사처럼 착한 캐릭터는 전혀 아님)
돌아보면 그때 그 시골이 싫고 토박이들에 둘러싸여 이방인인 게 싫었던 건 곤쥬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 동안 나 또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나 보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엄마는 가능한 해결 해주고 싶다. 혹은 적어도 방법을 찾게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엄마의 역할은 아이 스스로 방법을 찾기를, 아니 못 찾더라도 그 과정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을 지켜보고 격려해주는 것이 아닐까.
초보 엄마는 초보여서 그랬지만 사실 이후로 줄줄이 두 놈을 더 키우다 보니 아이들은 다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아이들에겐 각각의 모든 경우가 처음이니 엄마 노릇처럼 경력이 무의미한 직업이 또 있을까.
모를 땐 모르는 대로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거기까지가 내 몫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