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 마음을 쓴다

글 쓰는 이유

by sandew

이 죽일 놈의 기억력

원래도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편은 아니지만 유독 한 시기를 통째로 들어낸 것처럼 통 기억이 안나는 시절이 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간이었는지 알고 있는데 정작 그 시간 속의 나의 모습이 어땠는지 그때 느꼈던 감정, 그 일을 대했던 나의 태도와 지나온 일련의 과정들이 통 기억이 안 난단 말이다.


불혹을 넘겨 돌아보는 내 삶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전반적으로 평탄하고 무난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고부갈등, 이로 인한 엄마빠의 불화를 보고 자라며 한때는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젤 불행한 줄 알았던 적도 있었지만 살아보니 그 정도 갈등은 모든 삶에 다 있으며 심지어 우리 부모님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부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무 살에 유학을 떠났고 졸업하고 취직했으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왔다. 인생이 그렇듯 과정 과정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Up& Down이 있었을 것이고 죽고 싶다, 지친다 싶은 시절 또한 왜 없었겠냐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사고나 급작스런 병환으로 주변 사람을 잃는 충격적인 경험도 없었으니 지난 기억을 순삭 해야 할 만큼의 트라우마를 겪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나에겐 딱히 규정할 수 없는 무의식의 보호본능이랄까. 마주하기 싫은 현실은 피해 가듯 힘들었던 기억, 곱씹을수록 후회뿐인 실수, 차마 뒤돌아 보기 부끄러운 미숙함 등 마주하기 싫은 지난날의 날의 나의 모습을 지워버리는 건 그 시절을 지나오며 가슴에 깊이 파인 골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 심리학적으로 이런 연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나의 반응은 유년 시절 혹은 어떤 특정한 사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반복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오면 어김없이 delete 버튼과 함께 사라져 버려 남겨진 나를 지키는 방식이 되었다.


특히나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인 경우, 종종 조기 치매가 의심될 정도로 깜깜한 게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사실 살아온 모든 과정을 꼭 세세히 기억할 필요가 있나. 가뜩이나 바쁜 세상에 새로운 기억 심어 넣기도 바쁜데 좋은 기억도 아닌 안 좋은 기억을 욱여 욱여 끌어안고 살건 무언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회복 탄성이 좋은 성격이라며 자평하기도 했다.


순삭 된 기억의 흔적

그러나 치료되지 않은 상처는 어디엔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지워버렸기 때문에 나의 삶엔 좋은 기억만 남았고 지워버렸기 때문에 지난 일을 통해 배우지 못했다. 나이만 먹었지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여전히 후회를 두려워하며 미숙하고 서툰 모습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다.

어?? 분명히 지웠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마치 데자뷔처럼 지난날과 똑 닮은 일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자라나는 아이에게서 혹은 함께 살아온 배우자를 통해 내 삭제된 상처가 드러난다. 혼자가 아닌 삶은 쏙 뽑아버리면 그만인 기억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깔끔하지가 않아서 나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흔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주 숭한 모습으로 불쑥불쑥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아픈 마음을 쓴다.

줌마 쥐뜯 by sandew

좋았던 기억 속에 숨겨버린 어리석은 지난날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잊혀 한쪽 귀퉁이에 처박힌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쓰려다 멈추고 또 쓰다가 덮어버리기를 수십 번. 그러나 하나씩, 둘씩 그 기억을 되짚고 그때의 나를 만나 지금의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뿌연 안개가 걷히듯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는 어렵고 참담하게만 느껴지고 출구가 없을 것만 같았던 나의 청춘을, 때로는 대견하게 때로는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러나 그럼에도 회복해가는 놀라운 삶의 힘을 배운다. 그러면서 그 아팠던 마음은 여전히 유쾌하진 않지만 따뜻한 성장의 시간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 되었다.



글 쓰는 이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을 때 수많은 글을 쓰는 이유, 제각기 다른 이유들을 읽어보았다.

글쓰기가 곧 행복인 분들 정말 부럽다.

나에게는 고통이자 아픔인 이 과정이 언제인가 행복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아픈 마음을, 까먹고 병들은 그 마음을 굳이 꺼낸다.

치유의 힘을, 회복의 힘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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