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길목

그 청량한 쓸쓸함에 대하여

by sandew
IMG_7603.JPG Oil on Canvas, 6*8, 2013. 10.

아요와 에서의 첫가을.


미국에 온 이후로 안 바쁜 계절이 있었던가 싶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그 해 여름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그냥 갔다.

이사하고 짐 풀고 새로운 집,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 모든 생활이 10분 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캠퍼스 타운에서 한 손에는 4살 곤쥬의 손을 잡고 나머지 팔에는 돌도 안된 장남이를 안고 늘 흘러내려 한쪽 팔 어딘가 걸쳐있던 커다란 기저귀 가방을 들고 멘 채, 말 그대로 똥줄 빠지게 뛰어다니던 서른 중반의 아줌마가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하루가 끝나면, 아니 정확히는 아이들의 하루가 끝나면 하나둘씩 곯아떨어져 가는 동안 침대가 빨아들인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며 노곤해지는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버텨낸다. 어느새 선뜩해진 찬 기운이 구석구석 스며드는 부엌에 홀로 나와 밀린 집안일을 정리하고 캔버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김없이 손등이 트고 손끝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종일 물에 젖고 닦고를 반복하며 꺼칠해진 손을 따뜻한 유자차에 비비며 그제야 '아... 가을이네' 한다. 촉촉한 가을 냄새를 맡아본 지가 언제던가, 낙엽 색과 깔맞춤인듯한 커피 한잔을 들고 계절을 누릴 낭만도,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해 또다시 깨지고 일어섰던 지난여름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어제와 내일과 똑같은 하루를 보낸 서른 중반의 오늘.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삶의 한가운데서 허탈한 마음을 위로하듯 이미 식기 시작한 잔에 자꾸만 두 손을 비빈다.


이미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였지만, 마지막 잎새를 그려 넣고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싶었던 베어먼 아저씨의 마음이 그랬을까. 지난 한철 푸른빛을 뽐내던 잎사귀들이 빛바랜 모습으로 매달려 결국 떨어져 쌓여갈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 말이다. 비쩍 말라 민둥이가 된 가지에 한 잎 한 잎 자꾸만 그 잎을 채워 넣었다. 또다시 한 해를 보내며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 집과 마트만 오가며 이대로 나의 젊음이 끝나버릴까 두려웠던 아줌마의 늦은 가을밤의 기억.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하늘은 사실 하늘색과 하얀색 사이, 마치 빨래 잘못해 물 빠진 청바지처럼 희멀건한 색이다. 그러나 그 길목에서 바라본 나의 하늘은 여전히 짙고 푸르고 깊은 여름 바다 같은 청량한 하늘이었다고 믿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밤, 지금 그 밤하늘을 바라보며 여름 날을 추억하듯 지난 젊음을 그리워하는 엄마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차를 건네고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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