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 저편에는

시금치 밭에서 허우적거린 그 해 여름

by sandew
oil on canvas (24*30), 2012.08.


그 여름은 힘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혼 13년 에 접어든 지금은 여러 사건을 겪은 후로 '시'자 붙은 모든 관계들과 스스로 거리를 둠(?)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기에는 좀 일방적이지만 여튼 정서적인 독립을 선언한 상태이다. 아이가 있었으니 신혼이라기엔 좀 닳은 느낌이 있지만 긴세월 돌아보면 더없이 초자였던 결혼 3년 차가 되던 해, 우리는 미국으로 왔다. 덕분에 결혼 초기에 흔히들 경험하는 "서로 부대끼며 맺고 끊는 접점" 을 찾아가야 했던 참으로 피곤한 과정을 자연스레 피할 수 있었던 대신, 그 열매로 주어지는 적절한 거리 조절을 할 기회를 잃었다. 무엇보다 시부모님의 지원으로 학업을 시작한 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사랑을 가장해 '한 때' 품 안의 자식이었던, '이제는' 남의 남편의 된 아들을 놓지 못하는 부모에게 며느리 사랑이랑 그저 그 자식 뒷바라지 역할로 충실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순수한 그 '사랑'은 아니라는 만고의 진리를 전제로)이라는 걸 몰랐던 나는 표면상으로는 '며느리의 도리', '자식 된 도리'로 포장한, 실질적으로는 '받아쓰는 자식의 도리'라는 덜미에 갇혀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 와서도 마치 옆집에 사는 것처럼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 흔히 말하는 부모덕 보는 좋은 팔자에 분명 감사할 일이건만 속도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속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4년 차를 맞던 여름, '마침 시기가 맞아서', '외로운 가족 격려차' 오만 이름이 붙었지만 결국은 '보낸' 아들 찬스로 그 해 여름 '시가' 식구들의 휴가지는 우리 집이 되었다.


유난히도 낯가림이 심했던 딸램과 덜컥 시작한 남편의 유학 생활.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환경과 역할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며 보낸 1년 후의 난, 만 3살 아이가 있는 임신 8개월 차의 만삭 임산부였다. 두 돌 지나면 원에 보낸다는 강남 아줌마가 세돌이 넘도록 원은커녕 집 밖만 나가도 낯선 땅에서 들어올 때까지 울부짖던 곤쥬님 덕분에 세상 구경 한지 오래였지만 뒤늦은 학업에 매진하느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남편도 독박 육아의 짐을 덜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로 둘을 더 낳아 10년째 독박 육아 중이니 이때의 나에게 "라떼는 말야' 한마디 할 법도 하지만 돌아간다면 그저 그 시절의 나를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참 서툴고 부족한 나였다)


2년 과정인 석사 학위를 위해 왔으니 사실상 그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여름 방학이었던 그 해 여름. 큰 시누이 가족이 2주간, 그에 이어 시부모님이 오셨는데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작은 시누는 초2의 아들을 시부모님 편에 4주간의 summer camp으로 딸려 보냈다.


난.... 바빴다.

나름 곱게 자라 안 해보던 살림, 시엄니보다 더 무섭다는 시누 눈에 책 잡힐까 세끼 식사 차려내느라 이미 지쳤고 맞물려 맞은 부모님과 조카님의 방문은 피로함의 정점을 찍었다. 유독 입맛이 까다로우신 귀한 시조카님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 식사 한번 못 하셨는데 그때 그 며느리 멀 준비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것으로 봐서 별 거 안 했던 거 같고 그날 하루 종일 엄니의 카톡이 울릴 때마다 아들 걱정하는 작은 시누인가 조마조마했더랬다. 내 딸 하나도 너무 힘들었던 나는 2주 +4주간 아침마다 조카님들의 summer camp도시락을 싸야 했고(물론 그것 또한 지금 생각하면 너무 허술한 냉동식품 뎁히기 수준이었지만 그때의 난 세돌 엄마라 도시락은 엄마가 싸준 고딩 이후로 구경도 못해본 수준이었다) 외동딸 하나 키우다가 다 큰 초 2(우리 둘째가 지금 초2, 아직 애기인데 그땐 그 나이면 다 큰 줄 알았다)가 와서 둘이 싸우는 통에 형제간 싸움 구경 몬한 외동 엄마 혈압 여러 번 오르내리락 했다. 이 지겨운 여름이 언제 가나 꾸역꾸역 보냈던 두 달여의 시간.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고 숨 쉬는 것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부모님 시선엔 닿질 않았나보다. 숨막히는 더위가 계속된 8월, 막상 오시고 나니 일상이 무료하시다며 주말마다 여행을 가자 하셨다. 나도 여행 꽤 하던 집에서 자랐는데 그럼에도 평생 그렇게 많이 걸어본 적이 있나 싶었던 뉴욕, 만삭에 비옷입고 배탄 꼬라지 참담했던 나야가라 투어를 뽕 뽑았고 집에 돌아와 며칠 안 남은 저녁 산책길, 동네가 아름답다며 얼마나 감사하냐며 걷던 20분의 산책길은 혹독한 순례자의 길이 따로 없었다.


분명한 건, 시간은 간다.


불편함과 부당함과 부산함에 정신줄 놓기 일보직전,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나의 일상이 돌아왔다. 껌딱지 딸램은 여전하고 배는 한층 더 불러오는데 마주한 우리 집 전경이 이렇게 아름답고 평온할 줄이야. 캔버스 펼쳐 놓고 싱그러운 여름 햇살 아래 빛나는 나뭇잎 하나 찍을 때마다 번잡함 속에 떠나보낸 그 여름을 곱씹었더랬다.




마감과 디테일, 모든 면이 부족한 이 그림은 지금 우리 집 living room에 걸려있다. '엄마, 저 그림은 그리다가 만 거 같아', '뭔가 허전해' 아이들이 한마디 던질 때마다 생각한다. 그 때 그 창 너머를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이 그랬어. 미친듯이 바쁘게 지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빈 마음이랄까. 여전히 치열하게 그러나 미완성을 살아가는 지금도 이 앞에 서면 잠시 숨을 고르고 창밖을 보고 싶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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