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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Aug 18. 2020

코로나 시대의 부부싸움

서글픈 줌마의 야식

난 야식을 먹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전에 속이 더부륵한 느낌이 싫어서 저녁은 거의 먹지 않거나

먹더라도 늦어도 7시 전에는 식사를 끝내는 편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키우며 야밤에 종종 혼술을 할때조차 땅콩하나 없이 그저 깡술을 마실 정도이니 나에게 야식은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이 밤에 라면 끓여먹을때나 쓰는 단어일 뿐이다.

그런 내가 오늘밤 이리도 초라하고 궁상맞기 짝이 없는 야식상 앞에 앉았다.


3주 전 쯤인가 전례없는 격렬한 부부싸움을 했다.

격렬하다고 하면 꼭 치고박고 한바탕 때려부수기라도 한 것 같지만 

10여년쯤 지나면 부부싸움의 노하우가 생겨 아무리 화가 나도 수습이 힘든 때려부수는 일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다.

정말 안 살 생각도 무수히 해봤고 사실 실제로 집어 던지고 때려 부수는 일도 없진 않았으니 그랬던 우리가 지혜로워지거나 성숙해져서는 아니다. 다만, 그 난리를 겪고도 결국 주저앉을 일말의 가능성에 대비해 너무 극단적으로 치닫는 건 본능적으로 지양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그러나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한 폭력은 언어 폭력이라 했던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며 정말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넘어버린 격렬함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여파가 컸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

3월 13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속에 스쿨버스 타고 내렸던 아이들의 학교가 느닷없이 close를 공지하고 모든 사람이 집에 갇혔다. 뉴욕으로 출퇴근 하는 인구가 적지 않은 소외 뉴욕에 '기생'하는 state인 코네티컷도 매일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확진자, 사망자 소식에 모든 일상이 그날 그대로 멈추었다. 순식간에 몰과 상점들이 문을 걸어 잠궜고 화장지와 식료품들이 무섭게 동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코로나 시대, 우리 다섯 식구는 집에 갇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데도 가지 않고 주 최소 20끼 집밥을 함께 먹으며 매일매일이 전쟁인 몇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갑자기 전환된 아이들의 온라인 교육과 사회적 단절,  고통스러웠던 전반적인 상황에 비해 이사온 후로 줄곧 불화에 시달려온 우리 부부는 그 어느때보다 서로를 배려하며 조심스럽게 관계를 회복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틀어지면 너무 힘들어진다는 절대적인 생존 본능에서였으리라.

여름이 오면서 조금씩 re-open이 진행되고 우리 생활에는 사실상 큰 변화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는 조금씩 여유가 생겼었나 보다. 일단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벗어나니 자연스레 조금씩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맘에 차지 않는 점들이 새록새록 서로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라.

그렇게 우린 오래도록 잠자고 있던 휴화산이 터지듯 폭발적으로 서로를 향해 실랄한 비판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이 모든 사태가, 이 모든 어려움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는 듯 조목조목 따져가며 심지어 상대방의 반응을 비웃고 조롱해가며 서로의 마음에 매서운 갈퀴를 휘갈겼다.


부부가 10년을 넘게 살며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을까.

상처받고 위로하고 사과하고 다시 회복하는 단계는 일찌감치 지났고 반복되는 패턴에 지쳐서인지 혹은 회복에 대한 기대가 없어져서인지 언젠가부터 그냥 넘어가고 때로는 무시하고 혹은 뭍어두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곪았던게 터지면 그제야말로 끝장을 볼 거 같았는데 결국은 아이들 때문에 또 넘어가야 하는 상황 또한무수히 지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다툼은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니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모든 세월을 부정하는 그런 상실을 가져다 주었다. 


어린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기본적인 것부터 라이드, 모든 activity를 직접 해야하는 미국 부모에게는 감정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건 사치였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일상이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일단 너무 '불편'했다. 때문에 우리의 냉전은 길어야 3일을 채 넘기지 못했고 큰 아이가 머리가 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이 눈치가 보여서라도 일단 수습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거 같다. 그렇게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가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풀리기도 하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함께하는 이 시간이 모두에게 감정의 지옥이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지내다보면 또 어느샌가 잊혀지곤 했다.

그러나 아이건 어른이건 볼꼴 못볼꼴 다 보며 지내온 지난 몇달간 부모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과 죄책감조차 무뎌져버린 것일까. 우린 3주가 넘도록 이 한정된 집안이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회피하며 지내고 있다.


그래서 난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그가 쏟아부은 막말의 씨앗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인내와 노력에 대한 분노와 만나 내 맘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고 그런 감정으로 24시간 한 공간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스쳐야 하는 그를 마주앉아 식사하는 건 고문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있을만큼 키워놨으니 나는 이제 더이상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눈물을 삼키며 밥숟갈을 들이미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침 차려주고 올라가고 점심 차려주고 소파에 눕고 저녁 차려주고 거실에서 컴터를 하며 기다리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며 눈치를 보던 아이들도 엄마 수저와 컵을 빼고 식탁을 준비하고 음식을 내어놓고 나가는 나에게 잘먹을께요 인사하며 식탁에 앉게 되었다. 밥 먹고 난 후엔 으례 엄마를 찾아와서 머해? 엄마 왜 안먹어? 엄마 배 안고파? 말을 걸며 하나씩 쪼르르 와서 옹기종기 품에 안기던 아이들이 어느날부터인가 한놈은 점심엔 안 오고 한놈은 하루에 한번만 오더니 엄마는 그냥 알아서 먹거나 안 먹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매일같이 집에 있는 상황에 상 치우고 혼자 꾸역꾸역 살겠다고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어서 며칠은 정말 쌩으로 굶다가 이러다간 죽겠다 싶은 날엔 남은 음식을 주워 먹거나 간식을 챙겨 먹거나 했더랬다. 


오늘은 정말 배가 고팠다. 어제 종일 굶은 탓에 아침에 너무 배가 고파 쪽팔림 무릅쓰고 어제 저녁에 남은 김치찌게 뎁혀서 아침을 먹고나니 하루종일 속이 더부륵했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 먹은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오니 스멀스멀 속이 쓰려오는게 아닌가. 막둥이를 재우고 자려는데 점점 그 속쓰림이 뒤틀리는 고통으로 변해가는 느낌? 시커먼 부엌으로 내려와 주섬주섬 밥솥에 남은 밥과 냉장고에 어제 비빔밥하고 남은 고기, 그리고 냉동칸에 넣어둔 김으로 때우려는데 좀처럼 잔반을 남기지 않는 냉장고에 웬일로 깍두기가 랩에 싸여 있다.

오늘 10여년만의 나의 야식상은 이렇게 차려졌다. 

참으로 서글프게 요즘같은 비상 시국엔 구할 수조차 없어서 소주 한잔 까지 못하는 이민자의 하루를 마치며..

이 와중에 며칠전에 담궈놓고 맛도 못본 깍두기, 내가 했지만 참 맛나네.

ㄱㅐXX...이걸 먹고도 나한테 먹어보란 소리 한번 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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