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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Sep 21. 2020

영주권이 대수야?

삶의 우선순위

“여보, 그린카드 나왔어.”

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옅은 웃음을 띈 채, 말을 걸어왔다.

근 2개월 만의 첫 대화였다.


미국에 온 지 만 9년 만에 받은 영주권.

그가 이 일로 얼마나 마음을 졸여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7년간의 학위를 끝내고 이곳에 정착한 2년 전, 누구나 그렇듯 바로 영주권 수속을 밟았다.

트럼프의 들쭉날쭉한 이민 정책 아래서도 academic non-profit기관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아주 영향이 없다고 말할  없지만 비교적  문제없이 진행이 되어왔기 때문에 보통 취직하고 빠르면 1 , 늦어도 2 안에는 영주권과 체류 관련 문제가 마무리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에서 미국 비자 인터뷰를 준비했던 사람이라면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민국이라는 곳이 미국에 오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미국에 붙어먹겠다는 거렁뱅이 취급하며 어제까지 멀쩡하던  나라  신분이  무지랭이가 되는 굴욕적인 느낌을.  문제없을  한번 겪고  일이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자격 조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서류상 착오 같은 단순 문제일 경우도 의외로 많다)   꼬이면 그때부터 입국이고 체류고 인생이 아주 더럽게 꼬여버리는 상황을  또한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러니 수월하다고 해도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

차근차근 하나씩 별 무리 없이 진행되던 일이 마지막 관문이라는 인터뷰 날짜까지 잡혀서 한시름 놓았는가 싶었는데 지난 3월 이 팬더믹이 터지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모든 이민국 업무 일시 정시, 재개 여부는 미정"이라는 통보만 받은 채로 몇 달이 그냥 갔다. 여름에 조금씩 reopen이 진행되고 업무 재개한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밀린 순서대로 처리하는지 그냥 마구잡이로 처리하는지 아님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기다리던 중이었다. 남의 나라 사는 사람들에게 체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인지라 당장 먹고사는 게 끊기는 건 아니지만(그런 사람들도 수두룩) 한국의 부모님께 먼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옴짝 달짝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의 짐을 지고 산다.


그러나 현실의 오늘은...


시작은 여느 부부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곪았던 상처와 쌓인 세월만큼 패어온 깊은 골이 팬더믹이라는 더없이 극단적인 매개를 만나 10년 부부사에 남을 화산 폭발로 이어진 두어 달 전. 함께 살아온 모든 세월이 폭발한 화산재에 묻혀버린 그날 이후, 엄마빠의 '동거 중인 별거 상태'로 인해 상처 받고 있는 아이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의논해야 굴러가는 집안 모든 대소사들이 싸그리 반토박 난 채로 삐걱삐걱 무너져가는 삶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던 터였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24시간 붙어 지내며 망할 코로나를 원망하며 영주권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아무리 신경을 꺼도 함께 살던 촉이 있으니 며칠 전부터 우체국을 들락거리고 병원에 서류 떼러 다니며 들뜬 기분인 꼴을 보며 왜 몰랐을까.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부산을 떨더니 그린카드 발급받아 들어오는 길. 그간의 맘 졸임에 대한 안도감인지 지난 세월에 대한 성취감이었는지 혹은 함께 이룬 무언가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암튼 충분히 이해가 갈 법한 그 기분에 본인도 잠시 이성을 잃었는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조차 과도한 의미 부여 인지도 모르겠다.


2개월 만에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미묘하고 복잡한 심경이 오간 순간 난 말하고 싶었다.


영주권이 대수냐?

집안 꼴은 이 지경이고 11살 딸은 매일 밤 엄마 빠 이혼할까 봐 무섭다며 울며 자는 걸 알고 있니.

말하지 않는 부모와 24시간 함께 보낸 아이들의 마음에 생긴 상처가 넌 안 보이니.

너에게 학위를 비롯한 너의 일이 너무 중요해서 우리의 관계는 늘 미뤄져 왔고 돌이키기엔 너무 멀어져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그래서 당신의 고귀한 성과들이 우리 가정의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걸.

지금 그 니 손에 거머쥔 영주권조차 나에겐 개뿔도 의미가 없다는 걸 넌 모르뉘..


예전에 어장 관리에 아주 능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어장엔 최소 3마리 정도의 관리 중인 후보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을 1번, 2번, 3번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1번과의 관계가 쫑나고 위로의 술자리를 갖던 차 누군가 물었다.

“그럼 이제 2번이 1번 되는 거네?”

"이열~~~~~2번 축하, 아니 1번인가??ㄲㄲㄲ"

 모두가 물개 박수를 치고 환호하던 중, 그녀가 차갑게 대꾸하며

“아니…. 1번은 새로운 1번이 나타날 때까지 비워둘 뿐, 2번은 계속 2번이야.”라는 명언을 남겼다.

헐.... 저런 듣보미틴을 봤나 싶었는데....

그녀가 옳았다.

한번 우선순위에서 밀린 일은 영원히 그 우선순위를 대체하는 무엇인가에 의해 밀려난다는 걸.


겪지 못한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영주권을 못 받았더라도 서로를 믿고 격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린 견뎌냈을 거야. 넌 학위와 영주권을 얻었지만 당신이 그걸 얻기 위해 버려둔(아니 잠시 미룬, 그러다 계속 미룬) 우리가 돌보았어야 하는 서로의 삶과 상처는 이미 터지고 아물고 굳어서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 또한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세월을 부정당했을 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응"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카드를 내보이며 다시 말했다.

"이것 봐, 영주권 나왔다고"

.................

"알아, 그래서?"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의 벙찐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마지막 물음표와 함께 치켜뜬 눈썹의 의미를 그가 알 리가 없다.

다만 온몸으로 분노를, 배신감을, 경멸을 표하며 파국을 향해 가는 이 관계가,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통쾌해야 하는데,

하나도 안 통쾌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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