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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Mar 27. 2022

효도 한번 해보자는 거였는데

그분의 치밀하신 계획

누군가 십자가를 그리면 난 오목판의 연상했을 것이다.

그만큼 난 교회의 '교'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실 엄마는 천주교 모태 신앙이라서 어려서부터 우리  어딘가에는  십자가(천주교의 십자가는 십자가뿐인 기독교와 달리 예수님이 달려계신(?) 십자가다) 있었고 엄마의 은밀한 보금자리에는 거룩한 성모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몬가 귀한 ..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같다.

무교이신 아빠와 불교 신자셨던 할머니는 종교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셨는지 우리는 어려서부터 엄마와 함께 집 앞 성당에서 주일 미사에 참석했고 자연스럽게 세례를 받았다. 우리 집 책꽂이에는 성경 동화가 있어서 단군 신화처럼 성경 속 이야기를 받아들였고 어디든 어떤 형태의 묵주가 있어서 난 악세사리처럼 묵주를 갖고 다니는 게 왠지 멋져 보였다. 우리는 한 번도 함께 모여 기도하거나 (집집마다 좀 다르긴 하겠지만 성당에서는 기본적으로 통성 기도나 함께 몬가를 한다기보다 기도는 개인적인 영역인 거 같다) 찬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늘 종교란에 천주교라고 쓰는 '모태 신앙'이었다.

할머니가 믿는 부처님이나 가끔 할머니 방 문위에 붙어있는 부적의 대상이 되시는 누군지 모를 신, 애국가에 등장하는 우리나라를 보우하여 주시는 하느님이나, 대보름이나 추석이면 소원을 비는 달님, 산에 가면 층층이 쌓여있는 돌신인지 산신인지 모를 그분들,,,

나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들 중 하나였던 거 같다.


그러나 습관이 무섭다고 주일이면 성당에 갔고 수련회도 갔고 오빠들도 만났고 그러다 한동안 멀어지기도 하고 유학 가서도 한두 번은 성당을 찾았다. 미국에는 한국 성당이 많지가 않아서 종종 교회에 가보자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교회 친구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보스턴에서 한번 한국 교회에 갔다가 첫날부터 신상카드 들이대며 호구 조사를 펼치는 바람에 기겁해서 도망 나왔던 기억이 있어 그 후로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성당에 정기적으로 가진 않았지만 연례행사를 치르듯 부활과 크리스마스에는 고해성사를 했고 주문처럼 주기도문을 외며 죄를 씻어내는 기분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성모님을 찾아가 그 발밑에 앉아 있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캄캄한 본당에 조용히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접해서 나에겐 친숙했을 뿐 특별히 그분이 다른 신에 비해서 위대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고 종교는 개인의 자유라고 믿었다. 아마도 천주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한 기조를 갖고 있기 때문일지 몰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결(?)이 비슷하지만 하나님만 유일신이라며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유독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에게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난 타인의 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다.

남자 친구를 만날 때에도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부담을 가졌던 적은 없고 오히려 종교가 없는 것보다는 무언가 믿는 게 있다면 그에게 그런 성스런 면이 있다는 게 멋져 보여 더 호감을 가졌던 거 같다. 회사에서 노는 모임 (사실상 술 모임)을 통해 만난 남편이 교회에 다니는 줄은 알았지만 그는 누가 봐도 ‘술냄새’가 났으면 났지 ‘교회 냄새’라고는 풍겨본 적이 없어서 나처럼 나이롱 신자인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말했다.

결혼하면 주일날 부모님과 함께 예배에 가야 할 거 같다며. 매주는 아니고 꼭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머 몇 번 정도 다른 일이 없을 때 같이 가면 어떻겠냐 했다. 삶과 행실과 달리 꿈은 늘 현모양처였던 나에게 시부모님과 교회에 다니는 참한 며느리는 꿈에 그리던 모습이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상견례를 마친 그 주일,

난 시부모님과 첨으로 그분들이 출석하시는 교회에 갔다.


드라마에 나오는 딱 조신한 교회 며느리 차림으로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내 손을 꼽 잡고 기도하고 찬양하시던 어머니 옆에 앉아 있는데

한 번도 엄마한테 느껴보지 못한,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또 다른 엄마를 선물해준 감격이랄까.

그렇게 난 교회 다니는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하나님과의 찬란의 만남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거 같지만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니,,, 결국 딱 거기까지였다.

믿음이 없는 나에게 참한 며느리 노릇은 금방 싫증이 났고 의식처럼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지만 겉치레처럼 느껴지는 모습에 점점 하나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종교로 인한 첫 번째 분쟁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가뜩이나 조금씩 마음이 멀어지고 시댁에 대한 환상도 조금씩 깨지면서 주일마다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달까… 아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예배를 거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의 두 돌을 조금 앞둔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곤쥬가 유아세례를 받으려면 두 돌 전까지만 받을 수 있는데 얼마 전 장로님이 되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국의 초대형 교회 문화에서 정말 이런 비유는 너무 저질이라 피하고 싶지만 적절한 표현이 없는 관계로 대기업 임원으로 승진한 것 같은 대단한(?) 일이었다) 아버님 체면에 손녀가 유아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게 남 보기도 면이 안 서고 무엇보다 첫 친손주가 유아 세례를 받는 걸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시라니 효도하는 셈 치고받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몬가 내 안에서 확 올라오는 거부감.

내가 교회 가는 거 머라 한적 있냐

그러나 아이의 종교만큼은 내가 함부로 정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커서 지가 세례 받고 교회 간다면 누가 머라냐,

벌써부터 내가 부모의 자격으로 세례를 받게 하고 싶진 않다.

딱 잘라 말하는 나에게 내심 서운한 신랑과 며칠간의 냉전 후 내린 결론.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계신 부모님 소원이라는데 굳이 이렇게 며칠간 감정 상해가며 반대할 거 있나, 어려서 세례 받았어도 날라리 신자였던 나처럼 유아 세례 받고 안 믿는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도 아니고 지 종교는 지가 알아서 결정하겠지' 하고 하자고 했다.


결정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이 대형 교회의 시스템은 몬가 절차적으로 따지는 게 많아서

1. 엄마 아빠가 다 등록 교인이어야 하고

2. 세례를 받았어야 하며 (원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기에 이 부분은 통과할 수 있었다)

3. 등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갖는 기초 신앙 교육 프로그램인 1:1 제자 양육 프로그램을 해야 했다.

교회에서 지정해준 안수 집사님과 말 그대로 1:1로 교재를 바탕으로 신앙 교육을 16주간 진행하는 것인데 유아 세례의 자격 조건은 첫 4주 뿐이라서 힘들면 4주만 채우고 그만둬도 된다고 시어머니는 쉽게 말씀하셨다.

워낙 귀가 얇아 사기 맞기 딱 좋은 팔랑귀인 나는 '그런가? 그러면 되겠네' 싶어 흔쾌히 동의했다.


흥청망청,

술이야~ 흥이야~

나만 알고 나만 바라보고 살다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이제 겨우 다른 인격적 개체를 돌아볼 수 있게 된 미성숙한 인간인 나의 삶에

하나님은 (사실 이미 그전부터) 그렇게 훅~ 들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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