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디 설교 말씀은 잔소리처럼 자동 차단 기능이 있어서 막연히 좋은 말씀이려니 하고… 귀담아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전에 믿지 않던 누군가는 어느 날 주일 예배에서 어떤 말씀 한 마디에 마음이 꽂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도 하는데 나는 백날 들어도 그 말이 그 말 같고 좋은 말씀인 줄은 알겠는데 듣다 보면 너무 뻔해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달까. 여하튼 그러니 30분이 넘는 설교를 집중하고 들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중간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샛길로 빠지면 끝나고 머 먹지, 오늘따라 설교가 기네,,, 머 이런 생각을 하다 졸다 양손 들고 찬양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면 뭔가 한 주간의 죄를 씻김 받은 느낌? 그게 내가 예배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일대일 제자 양육 과정을 거치고 이후 세례까지 받고 난 후로는 그 말씀의 대상이 막연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향한 메시지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귀가 열렸다고 해야 하나? 어느 날부터 말씀이 달콤하다는 말이 이해가 가고 그 지루하고 똑같았던 잔소리가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고 시고 나와 하나님의 스토리로 다가왔다. 알게 될수록 놀랍고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이게 흔히 말하는 종교에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예배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이가 어려 자모실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난 본당에서 그리는 예배가 좋았다(그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어린아이와 함께 어른 예배를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라 남편과 격주로 한 사람이 유아 예배에 갔다가 다음 성인 예배 시간에 들어가고 나머지 한 명은 꼬맹이와 기다리며 주일엔 종일을 교회에서 보냈다.
유아 예배 시간은 본 예배와 각 4~6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분반 시간으로 나뉘었는데 워낙 어린아이들이라서 분반 시간엔 간단한 공작 등으로 말씀에 대한 걸 부모님과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각 분반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대부분은 학부형들이 섬겨(봉사) 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유일한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온 가족이 미국에 갔다가 애들 학업 문제로 가족들은 미국에 남고 본인만 한국에 들어와 기러기 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대부분은 젊은 아이 엄마인 선생님들이 까르르까르르 애들을 구워삶고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 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달리 우리 선생님은 워낙 말씀도 없으시고 그저 무뚝뚝~~~ 묵묵히~~~ 주어진 공과 시간이 끝나면 인사하고 헤어지는 식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교회에서 이런 일 하실 분이 아니신 거 같은데 억지로 하시나? 그러기엔 교회일이 무슨 돈이 나오나 경력이 되나 굳이 억지로 할 이유가 무언가.. 하던 어느 날, 뜽금없이 분반 소풍을 제안하셨다.
??
교회에서 하는 소풍이 아니라 주일 중 하루를 정해 예배가 끝난 후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이 하나당 부모가 모이면 꽤 많을 텐데 그 많은 인원이 어디서? 얘기는 여기서 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그런데 그때 내 마음이 그랬던 거 같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있을 때라 그랬나,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초대처럼 느껴질 때였다. 흔쾌히 가겠다고 했는데 진짜 안 친했던 나머지 부모들도 의외로 전원 참석하겠다고 날짜를 잡았다.
흠.. 의외로 주일에 할 일들이 없으신가..
참 의아한 모임이었다. 장소가 마땅찮자 선생님이 본인 집을 제안하셨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좀 있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본인도 거리가 맘에 걸리시는지 계속 멀어서 괜찮으신지 물어보시며 조심스러워하셨다.
도착한 선생님 집은 열댓 명 정도 들어가면 앉을자리가 없어 겹쳐 앉아야 할 정도로 협소했다. 사실 남자 혼자 임시로 사는 집이니 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찹찹찹 겹쳐질 듯 포개 앉으니 처음엔 못 들어갈 거 같더니 그 많은 인원이 다 들어가고도 꽤 여유가 있었다. 마치 빵 다섯 개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들어갈수록 자꾸만 쑤욱쑤욱 공간이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말씀이 없으신 우리 선생님은 소박하게 담은 과일을 내어 오셨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 모임은 기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게 내 생애 첫! 교회 사람들(?)과의 모임이었다. 기도로 시작하고 말씀을 나누고 거기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구 하나 소란스럽지 않게 그저 자기소개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 마음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 뭉클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을 닮아 모두가 낯을 가리던 우리 분반은 그 일을 계기로 크게 친해지거나 달라지지 않았고 이후로도 여전히 무뚝뚝한 선생님과 데면데면한 인사를 나누고 짧은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에 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 따뜻한 축복의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잘 몰랐던 그 만남의 의미는 이후 교회에서의 섬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부르셨는데 겁을 집어먹은 모세는 말주변이 없어 못한다 둘러댔다. 이미 하나님을 그를 대신해 말할 사람으로 아론을 준비하셨고 사실상 가서 전하라는 말을 전한 거 외에는 모세가 한 일이 없었다.
그 짧고 어색했던 만남은 이후로도 종종 생각이 났다. 누가 봐도 유아 예배 선생님 할 스탈(?)이 아니신 우리 선생님이 그를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 반에 있던 나와 같은 부모의 마음에 다가오셨던 게 아닐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조금 열심히 나온다 싶으면 어디선가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전 준비가 안 되었어요, 전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요, 기도해 볼게요.라고 은근히 거절의 뜻을 내비치곤 한다. 대부분은 하기 싫어서라기 보다는 진짜로 부담스럽고 자신이 없어서일 경우가 더 많다. 물론, 교회의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건 아주 위험한 접근이고 그 삶의 균형이 무너져서 잘못된 신앙으로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맞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기도하고 결정하고 시작하는 모든 일은 비록 시작이 그게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건 생각보다 더 놀라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는 일이 된다.
나 또한 때로는 내 뜻이 앞서 종종 실수하고 넘어진 적도 많았지만 교회와 함께한 모든 경험과 늘 상상 이상으로 채워주신 뜨거운 사랑의 기억은 내 안에 생생히 남아있다. 비록 지금은 잠시 떠나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떠올리는 그 기억들이 나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그분께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