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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Jan 04. 2023

시간 여행자의 새해

모르기에 떠날 수 있는 용기

집.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다.

폭풍 같았던 올해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고통의 시간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도 그 의미를 곱씹게 되는 연말이다. 

쏜살…. 쏘아버린 화살처럼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무엇을 기대할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라니 그 표현 덕분인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일시적이나마 과거형인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출국과 동시에 시작된 나의 새로운 여정은 말 그대로 쏜살처럼 6개월을 날아 지금에 왔다.


5/23/2022, 출국.

무언가에 떠밀려 휘몰아치듯 시간이 갔다.

예상보다 한 달 일찍 비행기를 타게 된 안개 자욱한 아침.

올 때는 한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두 번 바뀌어 한낮의 기온은 여름에 이른 듯하다.

꼭 3개월 만이다.

도망치듯 짐을 싸서 막둥이 손 부여잡고 이곳에 내렸을 땐, 

돌아가기 전에는 머라도 답을 내고 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스스로조차 아무 결심도 서지 않은 채로 저 자욱한 안개만큼이나 여전히 뿌연 앞날을 앞두고 돌아가야 할 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저 멀리에 이른 아침 떠오르는 햇살아래 수줍게 빛나는 금빛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공항이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지친 사람도 있고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네 인생길 같다. 

친구들이 역마살이 꼈다고 말할 정도로 여기저기 훌쩍 떠나기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이상하게 공항에만 오면 벅찬 설렘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곤 했다. 앞을 알 수 없어 두려운 지금의 나는 알 수 없기에 용감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린다. 짐가방을 들고 스쳐 지나가는 남녀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경쾌하게 느껴져서일까. 이미 날이 밝았음에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안개 조각들처럼 갑갑하게 짓눌렸던 마음을 잠시나마 날려본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지난 여정의 결과를 정산해 본다. 

Fact 1. 그 모든 과정을 겪고도 우린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

Fact 2. 이미 선을 넘은 양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그대로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Fact 3. 해결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인지 또다시 갈등을 드러내는 게 두렵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으로 시간을 ‘버티고’ 있다.

우습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기댈 곳이 없는 이민자 부모인 우리는 톱니바퀴처럼 촘촘하게 짜인 일정들을 수행하며 병든 가정을 지탱해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얻은 것도 잃은 것도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지만 현실의 오늘 하루는 사실상 매일을 살얼음을 걷는 조마조마함으로 견뎌왔다.

엄마와 아빠가 바닥을 드러내며 서로를 물어뜯는 상황에 노출되었던 아이들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휴전을 가장한 거짓 평화일지언정 어쨌거나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그 하찮은 평화가 적어도 나에겐 지난 폭풍을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소득이라고 느껴졌다. 




회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탱하고 있는 “기묘한 동거” 상태인 우리는 여전히 "헤어지는 중"이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 인생은 죽음이라는 헤어짐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다만, 나는 이 시간을 현실이라는 짐가방을 끌고 떠나는 삶의 여정이라 받아들이려고 한다.

삶의 자리를 잠시 떠나 동 시간을 살아가는 여행이 아닌 같은 삶의 자리에서 매일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여행말이다. 누군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는 앞뒤 재지 않고 훌쩍 떠나지만 인생의 동반자인 ‘변수’를 만나 예측하지 못한 사건, 사고를 겪기도 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여행처럼, 더 이상 맞고 틀린 가치가 아닌, 닥치고 감당하고 견뎌내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가보려고 한다. 

40대의 한가운데,

돌이키기엔 이미 멀리 왔고 그렇다고 주저앉고 포기하기엔 가야 할 길도 한참이다.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감인지,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이기심인지, 어리석었고 혹은 경솔했던, 그러나 결국 감당해야 할 선택의 결과인지 모르지만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모르기에 용감했던 지난날처럼 한번 더 용기를 내서 또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2023년이라는 시간으로의 멋진 여행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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