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웃으면 아이들도 웃는다
지난 학기는 너무 힘들었다.
이미 뒤늦은 시작이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엄마로서의 본업을 무시할 수 없기에 학기마다 수강할 수 있는 건 2과목 정도가 한계였다. 지난 봄학기 한국을 다녀오는 등 부산스런 상황으로 한 학기를 쉬게 되었으니 맘이 바빠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엇이라도 미친 듯이 매진할 수 있는 일이 간절히 필요했다. 조금 욕심을 내서 한 과목을 더해 3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내 평생 이렇게 바빴던 적이 있던가. 중간고사나 기말 기간에는 이걸 마칠 수 있을까 버거웠던 순간들도 있었고 아이들이 아프거나 학교를 못 가는 일이 생길 때면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언제 끝이 날까 싶은 학기가 끝나고 몸과 마음은 지칠 때로 지쳐있었지만 본인 스스로 정말 노력했다고 느낀 학기였고 이후 맞은 짧은 방학이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소홀했던 것들 아낌없이 해줘야지 계획은 찬란했지만 쉼이 두려웠던 채찍질 때문이었는지 나 또한 스스로 채울 양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기묘한 동거의 긴장감 속에서 아이들과 복닥거리며 연말을 보내고 새해가 되자마자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고 새 학기 전까지 약 2주간의 진정한 방학이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지독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였을까,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어지려고 하면 머리가 아팠고 유튜브, 독서, 심지어 말씀 설교까지 모든 다른 것에 몰두했다.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정작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굳이 정의하자면 무기력하게 분주한 상태?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났고 이 상황이, 내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서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려 하면 목이 메어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 때가 대부분이었다. 다시 돌아온 이후,,, 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딱히 누군가 붙잡고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고 필요도 없었지만 난 이제 차분하게 현실에 어려움과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대한 원망을 멈춘 뒤로 난 그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에게 화가 나지 않으며 그를 봐도 무덤덤할 뿐이다. 누가 봐도 나의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평온해졌다. 다만... 난 웃음을 잃었다. 감정을 배제하는 삶은 확실히 불행을 덜 느끼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최대한 덜 느끼고픈 의지는 그렇게 웃음이 사라진 무기력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음 주면 개강인데,
이런 여유도 없을 텐데,
미뤄뒀던 리스트가 줄줄인데,
오늘은 쉴래, 내일 하지 머 그렇게 미루던 중,
'방학 맞은 김에 미뤄뒀던 뉴욕 미술관에 한번 다녀올까봐' 우연히 꺼낸 얘기에 누군가 대뜸 같이 가자며 날짜를 잡자 했다. '어..난 혼자 가는 게 좋은데...' 귀찮다 생각했지만 '머.. 또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럴까' 말 나온 김에 마침 다음 날이 시간이 될 거 같아서 얘기했는데 정작 둘이 시간이 맞지가 않았다.
추적추적 서글픈 가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리는 아침, 쉬라는 뜻인가 보다 했다가 오늘이 아니면 또 못 갈 거 같아 마음먹은 김에 분주히 준비하고 아이들을 보내고 집을 나섰다.
궂은 날씨로 길이 막혀 1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이 넘게 운전하는 동안 오랜만에 '생각'을 했다. 라디오도 듣고 노래도 흥얼거리고 혼잣말로 했다가 커피도 마시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내 안의 나를 마주한 시간이었다. 눈도 비도 아닌 덩어리(?)가 흩날리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너무 쨍하지 않아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흐린 하늘도 좋았다.
맨해튼으로 들어서는 도로, 9A.
도심의 운전은 거칠다. 그런데 도시마다 그 거친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
운전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서울 운전은 무엇보다 그 간격이 좁다. 주차도 좁고 도로도 좁고 도저히 두 차가 지나갈 수 없는 길인데도 슝슝 잘만 빠져나가니 거기서 머뭇거리면 바로 클락션이 울린다. 뉴욕의 운전은 빠르다. 같은 도심인데도 상대적으로 간격이 크기 때문인지 일단 벌어졌다 싶으면 바로 속도를 올리며 차선을 바꾸기 때문에 마치 오락을 하는 것처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서울에서는 정교한 기술이, 뉴욕에서는 빠른 결단이 필요하달까. 그러니 서울에서 운전 좀 했더라도 뉴욕에 오면 버벅거리기 일쑤고 뉴욕에서 운전 좀 했더라도 서울은 또 다른 세계이다.
이리 쑥, 저리 쑥,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흐름 속에서 촌 아줌마 정신을 못 차리다가 로컬에 들어서 잠시 멈춰서야 호흡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문득, 안개 낀 도심의 아침이 눈에 들어왔다.
'어쩜... 오늘따라 안개도 운치 있네' 잠시 사진을 찍는 순간 빵빵,
그 사이 바뀐 신호에 머뭇거리는 몇 초를 못 참고 바로 경적이 울린다.
"아 c, 성질머리 하고는!" 불쑥 튀어나왔을 말이
서울에 살 때는 짜증 나기만 했던 도시 사람들의 신경질적인 재촉이
간만에 맡은 문명의 향기에 벌써부터 코가 벌렁거리는 아줌마 마음에도 한껏 여유로움을 불어 넣어줬는갑다.
"하이고 급하시긴... 쏴리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겨우 두시간 남짓의 콧바람, 좋아하는 그림들 맘껏 둘러보고 돌아왔는데
모처럼 나들이에 피곤해서 화낼 기력이 없어서였을까 난 참으로 오랜만에 피식피식 웃었다.
큰 애의 일상적인 시니컬한 농담이 오늘따라 유쾌했고 늘 투덜대는 둘째의 앞뒤 안 맞는 불평도 들어줄만했다. 수다쟁의 막내는 저녁 내내 질문이 끊이질 않는데 오늘은 10개 중 2개는 너무 참신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라며 소리 내 웃었다.
늘 그렇듯 아이들은 싸웠고 기도하는 시간마저 투정 부리고 순간순간 소란스러웠지만 중간중간 터져 나온 웃음은 순간의 갈등을 무시하기에 충분했다.
내일 아침은 또 피곤할지 모르겠다.
또다시 무너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은 더 자주 지금보다 웃어보려고 한다.
비록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정이지만, 엄마의 웃음이 우리 아이들을,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은 더 지켜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