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dew Apr 15. 2023

망연자실의 순간

다시 시작할 기회

봄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하와이에 다녀왔다.

겨우내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따뜻한 바람맞으며 봄기운을 조금 빨리 느끼고 싶은 바람이었달까.


생각해 보니 올해 8살을 앞둔 막둥이에겐 제대로 된 가족의 기억이 없다. 코네티컷에 이사 온 게 만 2살이었는데 이사오자마자는 정착하느라 몸도 마음도 여력이 없었으니 여행은 엄두도 못 냈고 간신히 숨 돌리고 나니 코로나가 찾아왔으니 간혹 하루 이틀 근처의 테마파크나 워터파크 등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였다. 지난해부터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으며 슬슬 여기저기서 여행을 떠나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자리에 이미 망가지고 부서진 우리 가족은 가족의 해체를 눈앞에 둔 마당에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회복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당장을 상아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고자 접촉 자체를 피하고자 하는 암묵적인 동의하게 가짜 평화를 되찾은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어떻게 이 삶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게 정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에겐 내가 선택한 삶을 책임지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남. 들. 처. 럼. 살게 되었다. 


어리석은 부모가 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혹은 삭힐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마음속 깊이 새겨지고 있겠지만 불안감 속에서 눈치만 보던 아이들도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씩 편해지고 혹은 익숙해졌다. 흉흉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예전에는 말도 꺼내지 못했을 텐데 슬슬 동네 친구 누구네는 디즈니랜드에 갔다 왔네, 캘리포니아에 갔네, 유럽에 갔네, 아이들도 부러움 섞인 투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누가 아파서, 바빠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뤄왔지만 언제까지 이 사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마음 한 켠엔 가족 여행의 기억이 없는 막둥이에게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가족 여행으로 봄 방학엔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준비하는 과정부터 출발 전까지 삐걱거리고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하와이에 도착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지상천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곳은... 그와 나의 신혼 여행지이다.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내 인생도 저렇게 빛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 10주년에는 아이들과 다시 오자 다짐했던 약속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한때 사랑했던 과거의 누군가와의 지켜지지 않은 수많은 약속이 그러하듯 부부의 약속 또한 약속을 할 때의 마음이 그대로일 때만 유효하다. 빛바랜 약속처럼 다시 찾은 하와이는 보기 드문 잿빛 하늘에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은 못내 실망스러운 눈치였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그와 나에겐 찬란한 푸른 하늘보다 기억을 잊을 듯한 낯선 잿빛 하늘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르겠다. 


아이들과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낸 어느 날,

가뜩이나 짧은 해변에서 파도가 들이치는 바로 끝에 막둥이가 모래성을 짓는다. 

"막둥아, 거기에 지으면 조금만 센 파도가 올라오면 홀랑 무너져 내려요. 좀 안쪽으로 옮겨 짓지 그래?",

"안쪽으로 가면 물 가져가기가 멀어져서 귀찮단 말이야. 그리고 벌써 이만큼 만들었다구."

부지런히 오가며 벽을 세우고 둑은 다지는 동안에도 넘을 듯 안 넘을 듯 몇 번이나 위태롭게 발끝까지 물이 올라온다.


"엄마, 이것 봐. 벌써 이만큼 했어!" 라며 벌떡 일어선 순간,

순식간에 들이닥친 파도

순식간에 덮친 파도가 그토록 공들인 성벽을 스르르 허물어버렸다. 쓸려나가는 모래를 정신없이 막으려고 해도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뿐이다. "어... 어.... 어...!" 허둥대던 막둥이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울먹이는 막둥이를 달래며 조용히 말해본다. 


사실 처음부터 그 자리는 그닥 좋은 자리가 아니었어. 그렇지만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쏟아부은 시간이 아까워서 나름대로 튼튼하게 다져가며 작은 위기들에 대비해 왔지. 하지만 내가 막을 수 없는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쓸려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어. 그러나 스스로 그만두지 못했을 나에게 아마도 지금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선물 같은 기회일지 몰라. 

그러니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하는 거야.

삶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이번에도 완벽한 조건은 없겠지만 또다시 무너져도 이제는 일어서는 법을 배웠잖아.


그리고 일주일이 갔다. 

첫날 흐리멍텅했던 하늘은 우리가 머무는 내내 거짓말처럼 쨍한 얼굴을 비춰주었고 쏟아지는 햇살아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활기찬 시간을 보냈다. (물론 중간중간 계속 싸웠지만^^). 무엇보다 온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매끼 식사를 한 건 거의 1-2년 만이었다. 15년 전 걸었던 길을 걸으며 그도 나도 지난 기억에 대해 한 마디로 꺼내지 않았지만 무너져버린 우리의 모래성에 대한 회환은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체념은 때로 감정을 다스리는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너무 큰 절망을 딛고 일어나야 했기에 난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면서 지난 겨울을, 지지난 겨울을 견뎌왔다.

아직도 코네티컷엔 차운 겨울바람이 궁뎅이를 버티고 앉아 봄이 오는 속도를 더디게 하고 있지만 이미 한껏 누그러진 4월의 햇살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번 봄은 

체념으로 견뎌내는 시간 말고

희망으로 나가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

매거진의 이전글 모심만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